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개헌 논의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물론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이들을 포함, 여야 할 것 없이 개헌의 필요성을 말한다. 한 설문조사 결과 20대 국회의원의 83%가 개헌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오기도 했다. 개헌 지지 이유는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30년이 지나 현실에 안 맞는다는 점을 든다. 그러고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그 대표적인 예로 꼽는다.
30년이나 지났으니 바꾸자는 주장부터 보자. 헌법은 한 나라의 기본적인 법질서를 규정하는 것이다. 단지 몇십년 흘렀다고 꼭 바꿔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일본이 70여년 만에 헌법 개정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30년은 긴 세월도 아니다. 독일이나 프랑스는 비교적 개헌이 잦지만 통치구조보다 세세한 조항을 바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08년 프랑스는 헌법 조문의 절반가량을 바꿨는데 이런 식의 개헌은 반세기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따라서 30년 됐으니 바꾸자는 주장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국민과 유리된 정치공학적 논의
제왕적 대통령제 주장은 어떤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1987년 9차 개헌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대통령을 견제하고 장기집권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대통령 권한은 축소됐고 국회의 권한이 강화됐음은 물론이다. 국회 소집요건 완화, 대정부 질문권이나 총리 및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권, 국정감사 부활 등이 모두 그렇다.
그래서인지 “대통령 못 해먹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해 노태우 대통령 이래 역대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조기 레임덕에 빠졌다. 제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대통령에 대한 막말과 비난, 패러디가 정치권 내에서는 물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조차 난무하는 요즘, 대통령을 과연 제왕적 대통령이라 할 수 있을까. 제왕적 대통령이란 개념은 주로 야당이 대통령을 폄훼하기 위해 써왔다. 요즘엔 여당도 쓴다. 계보나 당파의 보스로서 자신들의 정치 생명을 좌우한다는 의미에서는 제왕처럼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후진적 정치문화가 만들어낸 개념일 뿐, 우리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보장하고 있지 않다.
'제왕적 국회'가 더 문제
개헌파들은 대통령 5년 단임제가 책임정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이 다음 선거에서 평가받지 못하고 국정의 일관성도 떨어진다며 4년 중임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4년 만에 대통령이 바뀌면 정책 일관성은 더욱 떨어질 것이고 연임을 의식한 대통령은 포퓰리즘을 남발할 가능성이 크다. 연임에 성공해 8년을 한다면 장기집권을 통한 제왕적 대통령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를 말하지만 한국 정치 문화에서 성공 여부는 불투명하다.
개헌 주장은 시대적 절박성이나 국민적 열망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정치권의 필요에 의해 ‘붐 업’된 측면 ?더 크다. 대통령이 되고 싶고 집권하고 싶은 이들의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사실 개헌한다면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은 ‘제왕적 국회’ 권력을 제한하는 일이다. 국회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처럼 돼버렸다. 국회선진화법으로 개혁입법을 원천 봉쇄해놓고 민생은 외면한 채 규제만 양산하는 존재가 됐다. 수시로 3권분립 원칙까지 위협한다. 그런 국회와 정치인들이 스스로의 권력을 더 확대해보겠다는 게 작금의 개헌 논의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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