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냐 출신 소설가 응구기 와 티옹오, 돈의 신 경배하는 서구문명에 '일침'

입력 2016-10-13 17:22
'십자가 위의 악마' 출간

체제 비판하다 투옥돼 화장지에 몰래 쓴 작품
"민중이 각성해 공동체적 삶의 방식 복원해야"


[ 양병훈 기자 ]
선과 악이 구분되지 않는 아비규환의 공간이다. 모임 참가자들은 다른 사람을 등쳐 먹은 경험을 자랑스레 떠든다. 사회자는 “모든 참가자는 단상에 올라 자신이 어떻게 도둑질과 강도질을 시작하게 됐고 이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얘기하라”고 안내한다. 모임에 온 ‘국제도둑질과강도질협회(IOTR)’ 사절단장은 말한다. “도둑질과 강도질이 미국과 서구문명의 초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으리라 봅니다. 돈은 서구 세계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펄떡이는 심장입니다. 우리 식의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고 싶다면 돈의 신 앞에 엎드려 경배하십시오. 자식이나 부모, 형제자매의 사랑스러운 얼굴 같은 건 다 무시하십시오.”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유력 후보로 꼽힌 케냐 작가 응구기 와 티옹오의 대표작 《십자가 위의 악마》(창비)의 한 장면이다. 이 작품은 응구기가 케냐에서 지배층을 풍자한 희곡을 집필·상연했다가 1977년 교도소에 수감된 뒤 화장지에 몰래 써내려간 것이다. 지난 1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응구기는 현대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며 탈식민주의 문학을 주도해온 작가로 이름이 높다. 1938년 영국 식민지배 하의 케냐에서 태어나 1964년 이후 장편소설 《울지 마, 아이야》 《샛강》 《한톨의 밀알》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떠올랐다. 교도소에서 풀려난 뒤 미국으로 망명해 캘리포니아대에서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십자가 위의 악마》는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직후의 케냐가 배경이다. 한 여성이 겪는 고초를 통해 지배층의 물욕을 비판한 작품이다.

주인공 자신타 와링가는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수도 나이로비에 온다. 직장을 구하지만 상사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이틀 만에 쫓겨난다. 애인은 그를 힐난하며 떠나고 집세를 올려주지 못해 집에서도 쫓겨난다. 절망에 빠져 자살하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목숨을 구한다. 와랑가는 구해준 사람에게 고해하듯 자신의 곤경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 사람은 ‘현대판 도둑질과 강도질 경연 대회’라는 기이한 모임의 초대장 하나를 건네고 사라진다.

응구기는 이 작품을 통해 교묘해진 방식으로 여전히 개발도상국을 착취하는 선진국의 민낯을 보여준다. 거기에 기생해 자국 민중을 착취하는 개도국 지배층도 추악하게 묘사한다. 경연 대회는 선진국과 개도국 지배층이 민중을 수탈하면서 아무 죄책감도 못 느끼는 장면을 보여준다.

응구기는 1982년 처음 출간된 이 작품에 대해 “김지하 시인의 《오적》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榴?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민중이 각성하고 이들에 맞서 싸우며 공동체적 삶의 가치와 방식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응구기는 최근 한국 토지문화재단이 주는 국제문학상인 박경리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오는 19일 방한한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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