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이승만 대통령 하야…미국 하와이서 서거

입력 2016-10-07 16:25
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35)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선 안되네”

1960년 4월 19일 오후,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던 시위대 2000여 명은 당시 대통령 관저였던 경무대로 향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시위대가 경무대 입구에 도착하자 경찰이 총을 쏘았습니다. 그곳에서 21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일어났지요.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한 서울 시민 20만 명이 시위대에 합류했고 그 기세는 전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26일 측근으로부터 데모 상황을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래, 오늘은 한 사람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네. ……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그만 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내가 그만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우리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냈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다”라는 내용의 하야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하야는 관직이나 정계에 있던 사람이 그 자리에서 물러나 평민으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물러나고 3·15 부정 선거로 부통령이 되었던 이기붕 가족 네 명이 함께 자살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허정 외무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로써 4·19혁명 과정은 일단락이 지어졌습니다.

고국땅을 다시 밟지 못한 ‘거인’

그로부터 한 달 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그런데 사실은 망명이 아니라 휴양 차 한두 달 여행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하야 요청을 받아들여 자기 발로 대통령 관저를 걸어나온 전 대통령이 굳이 망명을 떠날 이유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사저인 이화장을 나서면서 “늦어도 한두 달 후면 돌아올 테니 집 잘 봐주게”라고 배웅 나온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또 비행기로 이승만 대통령을 안내한 허정 권한 대행은 “염려마시고 푹 쉬고 오십시오”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1965년 이승만 대통령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고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4·19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일반 대중이 들고 일어나 정권을 쓰러뜨린 최초의 사건입니다.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합니다. 또 한국의 민주주의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민주 혁명이기도 합니다.

물론 4·19혁명의 주역은 목숨을 걸고 불퓻?항거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주권자로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행동한 4·19혁명의 정신을 이 땅에 들여와 깊이 심은 사람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지요. 그는 해방 후 대한민국이 인간의 자유를 근원적인 가치로 받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가기를 진심으로 소망했고 그 실천을 위해 온갖 반대를 무릅썼습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뿌리내리도록 애쓴 그의 노력이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졌고 4.19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정신적 밑받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물러날 시기를 놓쳤던 이승만 대통령은 민중 봉기 끝에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공헌하고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공로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해방 직후 그는 완강하게 반공을 고집하고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확고히 세워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건국 초기 국가기틀 다진 정치인

대한민국이 건국될 무렵 이승만의 카리스마에 경쟁할 수 있는 다른 정치가는 없었습니다. 김구마저도 남북협상의 길로 들어서 5·10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 초기부터 국회를 장악한 지주·자본가 중심의 비판 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했습니다. 그들은 국회 중심의 정부 형태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것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여 이를 도입하였습니다.

6·25전쟁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게 된 것도 이승만 대통령의 활약 덕분이지요. 그는 또 미국 정부와 끊임없는 갈등을 겪으면서 원조 물자를 기반 공업 건설과 국민 교육에 투자할 수 있게 했습니다. 반공주의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확립, 시장 경제 체제에 의한 경제적 번영 등이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국민에게 안겨준 선물입니다. 그런 노력들이 밑거름이 되어 196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 성장의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모바일한경 구독신청] [한 경 스 탁 론 1 6 4 4 - 0 9 4 0]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