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CEO & Issue focus] '인도판 정주영'의 2세 무케시 암바니 릴라이언스그룹 회장, "할 수 있다" 도전의 DNA 물려받아

입력 2016-09-22 16:36
석유화학·통신·유통·엔터·생명공학…뛰어드는 사업마다 '게임의 법칙' 바꿔

꿈을 좇았던 아버지 디루바이
해외서 주유원 일하다 맨손 창업 "돈이 아닌 성취가 날 흥분시킨다"
40여년 만에 150년 역사 타타 제쳐

한 때 세계 최고 부자 '등극'
2007년 빌 게이츠·워런 버핏도 추월
현재는 재산 25조 세계 36번째 부자

부도 속출하던 통신업 진출 '승부수'
섬유분야 경쟁자 제압하던 방식처럼 통화요금 기존업체 10분의 1로 낮춰
단숨에 시장 점유율 2위로 뛰어올라

‘형제의 난’에 초호화 생활 구설도
동생 아닐과 양보없는 경영권 다툼에 인도경제까지 ‘흔들’…총리 나서 중재
베르사유궁보다 넓은 20억불 주택, 아내에겐 500억짜리 항공기 생일선물
인도인들 “번 돈 쓰는데 무슨 문제냐”


[ 강동균 기자 ] 2007년 11월, 세계의 시선이 인도에 쏠렸다. 일반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도의 한 기업가가 세계 최고 부자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이 기업가의 재산은 632억달러로, 멕시코 통신 재벌인 카를로스 슬림(622억9900만달러),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공동창업자(622억9000만달러), 워런 버핏 벅셔해서웨이 회장(559억달러) 등을 제쳤다.

주인공은 인도 최대 기업 릴라이언스그룹의 무케시 암바니 회장(59). 이후 릴라이언스 주가가 하락하고 보유 주식도 감소해 재산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암바니 회장은 여전히 인도 최고 갑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15년 동안 인도 최고 부호 자리를 놓친 적이 없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집계한 올해 9월 기준 암바니 회장의 재산은 227억달러(약 25조1920억원)로 세계 36번째 부자다.

‘인도판 정주영’의 아들

릴라이언스그룹은 타타그룹과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기업 집단이다. 150여년의 타타그룹에 비해 릴라이언스의 역사는 40여년으로 일천하다. 하지만 현재 규모와 수익 면에서는 타타를 넘어섰다. 릴라이언스의 사업은 섬유, 석유화학, 정유 및 가스 탐사, 정보통신, 소매 등에 퍼져 있다.

릴라이언스 창업주는 작고한 디루바이 암바니 회장이다. 그는 ‘인도의 정주영’이라 불렸다. 디루바이는 1932년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주에서 한 교사 집안의 둘째로 태어났다. 넉넉지 못한 형편 탓에 그의 관심은 온통 돈벌이에 집중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6세에 예멘으로 건너가 다국적 정유회사 셸(shell)의 주유원으로 일하다 1958년 인도 뭄바이로 돌아왔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종잣돈 5만루피(약 150만원)로 릴라이언스라는 무역회사를 차렸다. 회사는 2년 뒤 섬유산업에 진출했고, 1966년엔 방직공장을 세웠다.

1977년 기업을 공개해 5만8000명의 투자자를 모았다. 1982년 폴리에스터 합성섬유 생산에 뛰어들었고, 이후 석유화학, 정유, 가스 등 후방산업에 진출했다. 석유탐사·생산→정유→석유화학→섬유소재로 이어지는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고, 대규모 투자를 병행해 1993년 타타그룹을 제치고 인도 최대 기업 집단으로 부상했다.

디루바이는 꿈을 좇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할 수 있다’는 정신을 설파했다. “크게 보고, 남보다 앞서 생각하며, 미래를 내다보라”는 기업가정신을 강조했다. 농촌과 도시를 가리지 않고 그가 다녀간 자리에는 늘 투자자가 넘쳐났다. 이는 곧 기업 공개로 이어져 인도 주식시장 활성화를 가져왔다. 릴라이언스 주식을 보유한 인도 주식 투자자가 300만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당시 주식 투자자 4명 중 1명꼴이었다. 그는 “꿈을 꿀 수 있을 때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릴라이언스의 기업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릴라이언스의 슬로건은 ‘성장이 곧 생명’이다.

‘형제의 난’으로 위기 맞기도

“돈을 버는 일은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나를 진짜 흥분시키는 것은 내가 이루는 성취 그 자체다.” 디루바이가 평소 강조한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2002년 중풍으로 쓰러져 별세한 디루바이는 재산에 관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형 무케시 암바니와 동생 아닐 암바니, 두 형제의 경영권 투쟁을 가져왔다.

뭄바이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무케시는 미국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MBA)을 1년 다니다 인도로 돌아와 24세(1981년)부터 회사에서 일했다. 동생 아닐은 뭄바이대에서 기초과학을 전공한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MBA를 마치고 역시 24세(1983년)에 릴라이언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로 입사했다. 형제는 1986년 심장마비 후 몸이 불편해진 아버지를 대신해 경영을 맡았다. 2000년대 들어 통신, 유통, 생명공학, 엔터테인먼트 분야 등에 진출하며 그룹을 더욱 키웠다. “새로운 시장에 도전해 경쟁업체를 따돌리는 경영 방식과 수완은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작고하자 형제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눴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상호비방이 난무했다. 릴라이언스의 불안이 인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났기 때문에 외국인 투자자가 대거 빠져나가며 인도 주식시장이 출렁거릴 정도였다. 당시 만모한 싱 총리와 팔라니아판 치담바람 재무장관이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결국 2005년 9월 어머니의 중재로 릴라이언스그룹은 둘로 쪼개졌다. 무케시가 그룹 내 핵심 기업인 릴라이언스인더스트리를 비롯해 정유, 석유화학, 유통, 석유가스를 갖고 아닐은 통신, 금융, 전력,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차지했다.

능력 갖춘 2세…초호화 생활로 입방아에 올라

무케시는 ‘위대한 창업주의 나약한 2세’는 아니다. 그는 부친의 경영 능력을 이어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요한 시기마다 미래지향적 선택을 해 기업을 크게 키웠다. 그룹이 석유화학, 정유, 가스탐사, 이동통신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여러 섬유제품 가운데 폴리에스테르 부문 사업 규모를 키운 뒤 가격을 대폭 낮춰 경쟁기업을 고사시켰다. 특히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든 것은 그의 경영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00년대 초반 인도 통신시장은 실적이 악화되고 라이선스 비용이 커 전망이 매우 불투명했다. 기존 사업자들은 정부에 내는 라이선스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부도가 속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그는 통신사업 진출을 밀어붙였다.

정부 규제로 통화요금이 비싼 것을 역이용했다. 경쟁업체를 따돌리기 위해 통화요금을 기존 업체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췄다. 시장 지배자인 바르티 에어텔(Bharti Airtel)을 잡는 데는 실패했지만 시장점유율 2위 업체에 올랐다.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분야,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는 분야에 진출하는 게 그의 사업 전략이다.

무케시는 2010년 뭄바이 해안가에 20억달러를 들여 ‘안틀리아’라고 불리는 호화저택을 지었다. 높이 172m(일반 건물 60층 높이), 연면적 3만7000㎡의 27층 건물이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보다 더 넓다. 원래 60층으로 계획했지만 가족들이 천장이 높은 방을 원해 전체 건물의 높이는 같게 하면서 층수만 27층으로 낮췄다. 헬스·스파 시설, 극장, 연회장, 헬기 이·착륙장을 갖췄고 관리 직원만 600명에 이른다.

무케시의 초호화 생활은 ‘퇴폐성 소비주의의 극치’라는 비난을 받는다. 2007년에는 영화배우 출신 아내의 생일 선물로 500억원 상당의 22인승 항공기를 사줘 입방아에 올랐다. 이런 생활에 대해 해외 언론은 비판적이다. 인도엔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먹고사는 극빈층이 2억명이나 된다. 그러나 정작 인도 내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학풍의 네루대 교수와 학생들도 “스스로 돈을 많이 벌어 자기 돈 쓰는데 뭐가 큰 문제냐”며 “세계 최고 수준의 갑부가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강동균 기자 kd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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