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사 '콕 찌르기'] (33) 구텐베르그 금속활자와 직지

입력 2016-09-09 16:32
장원재 박사의'그것이 알고 싶지?'

구텐베르그 금속활자가 유럽문명 바꿨다
베껴 쓸 때보다 책 보급 많아지고 빨라져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은 1377년에 나온 ‘직지심체요절’입니다. 고려 말 백운이라는 승려가 선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모아서 만든 책입니다. 1452년 독일의 구텐베르그보다 훨씬 앞섰습니다. 하지만 문명사적 관점에서는 구텐베르그의 영향력이 더 지대했습니다. 금속활자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손으로 책을 베껴 썼습니다. 손글씨 수작업으로 기록한 책을 필사본(筆寫本)이라고 하는데, 베껴 쓰는 과정에서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많이 나왔습니다. 후대 학자들이 여러 판본을 모아 서로 비교하는 학문이 있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필사본은 ‘책을 제작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자는 하루에 3000단어 정도를 쓰는 것이 물리적, 신체적 한계입니다. 책 한 권을 베끼는 데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하고, 성서처럼 두꺼운 책은 서너 달이 걸렸습니다. 손글씨는 활자 글씨보다 큽니다. 책의 판형과 두께가 지금보다 훨씬 크고 두꺼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이 품질도 현대보다 떨어졌을 터이니 제본 비용도 당연히 어마어마했겠지요. 동서양 모두 인쇄술 발명 이전에는 책 한 권 값이 집 한 채 값과 비슷했다?기록이 있습니다.

구텐베르그가 일으킨 정보 혁명

금속활자의 위대함은 책의 제작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정보의 유통량을 비약적으로 늘렸다는 점입니다. 한 번 활자를 제작하고 나면 대량 인쇄가 가능합니다. 활자를 새로 만들 필요 없이, 다시 배열만 하면 아무리 새로운 내용의 책이라도 찍어낼 수 있습니다. 구텐베르그 이후, 정보와 지식의 유통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책’이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양의 근대화를 이끈 원동력이라고 평가하는 학자가 많습니다. 나무에 활자를 새겨 책을 인쇄하는 목판본은 필사본에 비해서는 효율적인 방식이지만, 역시 수공업적인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 방식입니다.

일단 목판을 새겨야 하고, 한 번 새긴 목판은 오직 그 책을 위해서만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에서 금속활자는 주로 종교적 문헌을 제작하는 데 쓰였습니다. 지식의 전파와 활용에 필요한 하드웨어는 만들어냈지만,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단계로는 진화하지 못했습니다.

‘구텐베르그’라는 이름 뒤에는 성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42행 라틴어 성서가 따라 붙습니다. ‘성직자들의 전유물이던 성서를 일반인도 볼 수 있게 해 신의 말씀이 널리 퍼지도록 했다’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텐베르크가 ‘성서 인쇄’ 때문에 파산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기록에 따르면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뒤 가장 먼저 발간한 ??라틴어 문법책입니다. 당시 유럽의 모든 대학은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시중에서 널리 쓰이는 언어가 아니라 오직 라틴어로만 강의했습니다. 모든 대학생에게 정말로 필요했던 교재였습니다. 구텐베르크는 ‘확실한 수요’가 있는 ‘시장’을 찾아 ‘혁신적 공급’을 한 것입니다. 기존의 필사본 문법책에 비해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책을 판매한 것이니까요.

라틴어 문법책 《도나투스》의 성공에 힘입어 구텐베르크는 일반인 대상 인쇄물로 시야를 돌립니다. ‘면죄부(免罪符)’ 인쇄입니다. 당시의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면죄부의 효능은 연옥에 머무르는 기간을 단축해 주는 것입니다. 선한 영혼이 바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일단 연옥을 거치는데, 지옥에 갈 정도가 아니면 연옥에서 죄값을 다 치러야만 비로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번 구입하면 평생의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3개월권, 6개월권, 1년권 등이 있었습니다. 면죄부를 돈을 내고 구입하면 그 기간에 지은 죄에 대해서는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기간에 지은 죄는 연옥에 머무르는 시간과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죄를 먼저 짓고 사후에 ‘소급 면죄부’를 웃돈을 주고 구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에 기여했다고?

당시 가톨릭교회의 주수입원 가운데 하나가 면죄부였습니다. 문제는 면죄부처럼 인간의 영혼에 관한 중요한 사안은 확실한 ‘문서’를 원하는 당대인들의 심리였습니다. 당연히 싸구려로 만들 수 없고, 최대한 기품이 있으면서도 격조있게 제작해야 했습니다. 수작업으로 일일이 그린 면죄부 가운데는 훗날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작품’이 있을 정도입니다. 구텐베르크는 수작업으로 그리던 면죄부를 대량으로 ‘인쇄’해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유럽에서 말하는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조 논제 대자보를 붙인 것이 효시입니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문제점, 특히 면죄부의 발행과 판매를 신랄하게 공격했습니다. 루터 이전에도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루터에게는 이전의 사람들에게는 없는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인쇄술입니다. 1517년에는 지역마다 인쇄 기술이 널리 보급돼 있었습니다. 그의 대자보는 인쇄물 형태로 독일 전역에 퍼졌고,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으로 발전했습니다. 인쇄술 때문에 면죄부의 대량 생산과 판매가 가능했고 인쇄술 덕분에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종교개혁도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쇄업은 베네치아에서 ‘활짝’

구텐베르크는 이후에도 ‘돈이 되는’ 인쇄물로 수익을 올렸지만 야심차게 발간한 성서(200권을 찍었습니다)가 거의 팔리지 않아 파산하고 맙니다. 인쇄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정도였습니다. 인쇄업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출판업으로 발전한 것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특히 베네치아에서였습니다. 가장 잘 팔린 책은 성애소설과 로맨스였고, ‘무거운 책’들은 판매량과 상관없이 근대화 현대화에 기여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의 계산으로는 금속활자 발명 이후 적어도 정보의 제작 및 유통비용이 8분의 1 이하로 줄었고, 장기적으灌?필사본 시대에 비해 3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고 평가합니다. 모두 구텐베르크 덕분입니다.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모바일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