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관리 기업 1150개] 판사 1명이 평균 25개사 관리…순환보직에 파산부 경력 길어야 3년

입력 2016-09-04 18:29
전문성·시간 부족…장부 쳐다보기도 바빠

1천만원 이상 집행 결재 등 현안 모두 관리

"도산법원 설립·인력 대폭 확충 등 시급"


[ 이지훈 / 오상헌 기자 ]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는 지난달 31일 한진해운이 신청한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사건을 A부장판사에게 배정했다. A부장판사는 올초 인사 때 자리를 옮긴 ‘경력 6개월의 파산부 판사’다. 그런 그가 자산 규모가 6조7000억원에 달하는 국내 1위, 세계 7위 해운사의 ‘임시 선장’으로 사실상 내정된 것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배속된 다른 2명의 부장판사가 워낙 많은 기업을 맡고 있는 탓에 한진해운까지 맡을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며 “오죽 사람이 없었으면 법정관리 경험이 부족한 판사에게 거대 해운사를 맡겼겠느냐”고 말했다.

판사 한 명이 25개 기업 맡아

법정관리를 받는 기업이 급증하면서 법원의 ‘부실 관리’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판사 한 명당 담당하는 법정관리 기업이 너무 많은 데다 1~3년마다 자리를 옮기는 순환보직 시스템 탓에 전문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법조계와 재계에서는 이를 해결할 대안으로 법정관리 및 파산만 전담하는 도산법원을 설립하자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4일 현재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맡고 있는 법정관리 기업은 450개에 달한다. 파산부 소속 판사가 18명인 점을 감안하면 1인당 평균 25개 기업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 이 중 5명은 기업 회생 업무 외에 기업 파산과 개인 회생·파산 업무도 담당한다. 사실상 온전하게 법정관리 업무에 모든 시간을 쏟는 판사는 13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서울중앙지법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춘천 전주 제주 청주 울산 등 5개 지방법원은 별도의 전담 판사와 파산부가 없어 민사부 판사들이 기업회생 업무를 겸직하고 있다. 임기도 마찬가지다. 서울중앙지법은 최대 3년까지 파산부에서 일하도록 인사 원칙을 짰지만, 다른 법원들은 순환보직 원칙에 따라 파산부 판사들도 예외없이 매년 인사 대상에 올리고 있다.

회계법인의 한 관계자는 “판사들이 법정관리 업무를 손에 익히는 데 통상 6개월에서 1년가량 걸린다”며 “서울을 제외한 지방법원은 판사가 파산 업무를 익힐 만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법정관리 담당 판사에게 주어진 업무가 ‘형식적인 관리’에 그친다면 많은 기업을 담당해도 큰 문제가 없지만, 통합도산법과 실무 가이드라인은 판사에게 상당한 업무량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일상적인 경영은 법원이 선임한 법정관리인을 중심으로 꾸리지만 중요한 경영 판단은 판사가 직접 결정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비용 통제도 판사의 몫이다. 기업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법정관리 기업은 담당 판사의 허락 없이는 한 번에 1000만원이 넘는 예산을 지출할 수 없다.

“도산전문법원 만들자”

법조계와 재계에서는 현행 법정관리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으로 도산전문법원 설립을 꼽고 있다. 법원도 내심 도산법원 설립을 바라는 분위기다. 도산법원은 행정법원이나 특허법원처럼 기업 및 개인 회생·파산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독립적인 법원을 말한다. 미국은 97개 도산법원을 두고 있다. 소속 판사의 임기는 14년에 달하며, 연임도 가능하다. 최장 28년 동안 법정관리 및 파산 관련 업무만 수행할 수 있다는 얘기다.

국내에서도 미국 사례를 참고해 도산법원을 설립할 경우 별도 인사시스템을 가동해 소속 판사의 근무기간을 5~10년으로 조정해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도산법원을 설립하면 판사뿐만 아니라 채권신고와 접수, 채권조사 및 확정, 채권자 표 작성, 관계인 집회 등을 처리해야 하는 사무직 직원들의 전문성도 함께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홍성준 태평양 변호사도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기업이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큰 만큼 파산 담당 판사들의 전문성 확대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이지훈/오상헌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