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썸이 있는 섬…감성과 낭만이 흐른다

입력 2016-08-21 15:20

섬에는 감성과 낭만이 흐른다. 눈이 시릴 듯한 푸른 바다, 밟으면 녹을 듯한 새하얀 모래도 섬에서 만나면 더욱 특별해진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고독한 시간이 깃든 섬에서 철학자처럼 거닐어보는 것은 어떨까. 여름은 섬 여행을 떠나기 좋은 계절. 언제나 두 팔 벌려 방문객을 맞이하는 섬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열강이 먼저 탐냈던 조도

전남 진도의 섬, 조도(鳥島)는 다리로 연결된 하조도와 상조도 두 개 섬을 통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새떼처럼 수많은 섬이 무리를 지어 모여 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조도면에만 170여개의 섬이 있다. 1개 면 단위의 섬이 섬 왕국을 표방하는 옹진군이나 남해군보다도 많다.

조선시대 말에는 동아시아 진출을 노리는 영국 함대가 먼저 조도의 지정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1816년 산둥성 웨이하이를 순방하고 돌아가던 영국 함대 3척이 조도에 입항하고 섬을 조사했다. 3척 중 하나인 리라호의 선장 바실 헐은 ‘한국 서해안과 유구도 탐색 항해 전말서’에서 진도 조도해역이 동양에서 항구 건설에 가장 좋은 후보지라고 언급했다. ‘산마루에서 주위를 바라보니 섬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섬들을 세어보려 애를 썼으나,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120개는 되는 듯했다. 경치는 황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는 문구도 있다. 우리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을 때 서구 열강들이 먼저 조도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조도에는 상조도 도리산 전망대나 하조도 등대 등 빼어난 전망을 가진 곳이 많다. 하지만 조도 최고의 비경은 하조도 돈대산 손가락 바위가 꼽힌다. 산 능선에 층암절벽이 거대한 손가락처럼 우뚝 솟은 손가락 바위 자체도 기이하지만,

손가락 바위 중간쯤에 있는 바위 동굴에서 펼쳐지는 풍경은 더욱 놀랍다. 밧줄을 타고 올라 동굴로 들어서면 끝 부분이 바다 쪽으로 터져 있는데 그 풍경이 액자 속 그림 같다. 그 속에서 다도해 짙푸른 바다와 관매도, 청등도 같은 진도의 섬들이 환영처럼 다가온다.

생명의 화석이 깃든 소청도

서해 5도 중 하나인 인천의 섬 소청도에는 전설 같은 설산이 있다. 눈에 덮인 것처럼 하얀 바위산이다. 섬사람들은 대리암으로 된 이 산을 분바위라고 부른다. 대리암은 석회암이 변성작용을 받아 생긴 암석인데 대리암의 표면이 해안침식작용으로 노출되고 풍화돼 분칠한 것처럼 보여서 붙은 이름이 분바위다. 분바위는 달빛을 받으면 하얀 띠를 두른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월띠라고도 부른다. 등대가 없던 시절 뱃사람들은 칠흑의 밤바다에서 분바위가 뿜어내는 흰 빛을 보고 뱃길을 찾기도 했다.

분바위 주변 대리암에는 10억년 전에 번성했던 생명의 화석이 깃들어 있다. 스트로마톨라이트(stromatolite)는 바다, 호수 등에 서식하는 남조류나 남조박테리아 등의 화석이 쌓여 암석이 된 것이다. 남조류는 지구에서 최초로 광합성을 시작한 원시 미생물인데 남조류가 산소를 만들어낸 덕분에 생명이 지구 위에 번성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는 20억년 전 생성된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보고된 적이 있지만 한국에서 발견된 화석 중에서는 소청도의 스트로마톨라이트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질학적으로 더없이

중한 자연유산이지만 일본 강점기 때부터 훼손됐다. 당시 일본은 소연평도의 철광석과 함께 소청도의 대리암도 대량으로 채굴해 갔다. 해방 후에도 1980년대 초까지 스트로마톨라이트 무늬를 이용한 문양석 가공 공장이 가동돼 많은 화석이 사라졌다. 2009년 11월10일에 천연기념물 제508호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분바위와 스트로마톨라이트 등 빼어난 풍경과 생태자원을 간직한 소청도로 가는 길은 멀고도 멀다. 그 덕에 난개발의 광풍을 맞지 않고 아직도 원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비할 것 없이 아름다운 비진도

지금은 소매물도나 욕지도가 경남 통영의 대표적인 섬 여행지가 됐지만 과거에는 비진도가 제일이었다. 비진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는데 보배(珍)에 견줄(比) 만큼 아름답다고 해 이름도 비진도다. 실제로도 이름값을 할 만큼 경관이 수려하다. 이순신 장군의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던 한산도가 비진도의 어미 섬이다.

비진도에는 내항과 외항 두 개의 큰 마을이 있다. 내항은 안섬 혹은 안비진, 외항은 밧목 혹은 바깥비진이라 한다. 두 마을 외에 물개 혹은 수포라 하는 뜸(외딴 작은 마을)이 하나 더 있다. 통영 쪽으로 가까운 마을이 안비진이고 큰 바다에 가까운 마을이 바깥비진이다. 외항 마을 양면의 해수욕장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특별한 해변이다. 한쪽은 고운 산호빛 모래해변인데 다른 쪽은 굵은 몽돌이 가득하다. 등을 대고 있는 두 해변이 전혀 다른 모습이라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비진도는 일찍부터 외부 문물이 들어와 크게 번성했다. 한때는 한산면의 서울이라 불리기도 했다. 1940년대에 비진도 주민들은 연극을 제

해 이웃 섬으로 순회공연까지 다녔다. 과거 비진도에는 집채만 한 고래가 떠밀려왔다거나 마당만 한 크기의 가오리가 유유히 떠다녔다거나 염소를 통째로 삼키고 바다를 헤엄쳐가던 거대한 구렁이를 목격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많이 전해져 내려온다. 산란철이면 외항 마을 안바다까지 상어 떼도 몰려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진 대물들의 시대. 상상만으로도 가슴 뛰는 이야기들이다.

비진도의 주산인 선유봉은 외항마을과 모래톱으로 이어진 수포 쪽에 있는데 산 중턱 ‘미인도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절경이다. 누워 있는 여인의 형상이라 미인도라고도 불리는 소지도를 비롯한 한려해상국립공원 섬들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다가온다. 미인도 전망대까지 오르는 길은 좀 가파르지만 30분 정도면 충분히 오를 수 있다. 전망대에 오르는 순간 흘린 땀과 노고를 보상받고도 남는다. 빼어난 비경 앞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해양 생태계의 寶庫 송이도

전남 영광군에 있는 송이도는 예전에 최고의 조기 어장이었던 칠산 바다 한가운데 있다. 영광굴비의 명성은 모두 이 칠산어장에서 잡힌 조기 덕분이었다. 일곱 개의 작은 섬이 나란히 서 있어서 칠산도인데 칠산 어장의 이름은 이 섬들에서 비롯됐다.

송이도는 칠산도의 모섬이다. 칠산어장 덕에 옛날 많은 송이도 사람들은 조기잡이로 큰돈을 벌기도 했다. 치어까지 마구잡이로 싹쓸이해버린 인간의 탐욕 탓에 이제 칠산 어장에는 조기의 씨가 말랐다. 하지만 송이도 주변은 여전히 해양 생태계의 보고다. 여름이면 아직도 대물 민어들이 제법 올라오고 젓새우는 여전히 송이도 특산물이다. 여름철 갓 잡아온 싱싱한 민어를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섬 중 하나다. 모두 송이도 주변 바다에 있는 거대한 풀등 덕분이다. 풀등은 밀물 때면 바닷속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 평원인데 언뜻 사막처럼 보이는 이 풀등은 바다 생물의 오아시스다.

모래밭이지만 펄도 섞여 있는 송이도 풀등은 혼합 갯벌이기 때문에 과거에는 조기떼의 산란장이었고 지금도 동백하 새우의 서식처다. 풀등은 새우뿐 아니라 바지락, 맛조개, 대합 같은 조개가 많이 나는 조개밭이기도 하다. 펄이 섞여 있지만 송이도 풀등은 맨발로 걸어 들어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 썰물 때 이 풀등을 걷고 있노라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처럼 더없이 안온해진다. 송이도에는 또 국내 어디에서도 쉽게 보기 어려운 하얀 몽돌 해변이 있는데, 풀등 못지않은 송이도의 명물이다.

사랑의 전설이 남아 있는 박지도

전남 신안군 안좌면에 딸린 박지도는 바가지처럼 생겼다 해서 배기섬 혹은 바기섬이라고도 불렀다. 박지도는 백일도(白一島)라고도 했는데 온종일 해가 드는 밝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마을에 가면 해가 떠서 지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종일 볕이 든다.

섬은 수화 김환기 화백의 고향인 안좌도와 다리로 연결돼 있다. 다리 이름은 천사의 다리인데 사람이나 이륜차만 다닐 수 있다. 밀물 때 가면 바다 한가운데를 걷는 환상적인 기분이 든다. 천사의 다리는 박지도를 거처 반월도까지 이어진다. 박지도에는 해안선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는데 전체 길이가 4㎞에 불과하다.

육지 사람들은 섬이라면 다들 어업에만 종사하고 사는 줄 알지만 박지도의 주업은 농사다. 지금은 묵히고 있으나 예전에는 산꼭대기까지도 논이 있었다. 작은 섬 치고 물 사정이 좋았기 때문이다. 섬의 형상 때문에 어선을 부리는 사람이 없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바가지가 엎어진 섬의 모양 때문에 배가 엎어진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비슷한 것끼리는 감응한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이다. 바닷가 사람들이 생선의 배를 뒤집어 먹지 않는 것도 유감주술의 하나다.
박지도는 썰물이면 근처 섬까지 이어질 정도로 광대한 갯벌을 가지고 있다. 수많은 간척으로 사라져버린 갯벌들의 원형이 박지도에 남아 있다. 갯벌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득한 감동이 밀려온다.

과거 가까운 섬들은 갯벌에 징검다리를 놓고 건넜는데 이를 노두라 한다. 마주 보고 있는 박지도와 반월도 사이에도 노두가 있었는데 이름은 중노두다, 노두에 얽힌 전설은 사뭇 애잔하다. 반월도와 박지도 두 섬에 살던 남녀 두 스님은 멀리서 보이는 모습만으로 서로 사모했다. 머리는 깎았으되 청춘의 혈기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서로에게 건너가기 위해 비구와 비구니는 수십년에 걸쳐 갯벌에 징검다리를 놓았다. 마지막 노둣돌이 이어지던 날 둘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노두만 남았다. 우리의 사랑도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바다에 다리라도 놓을 수 있을 것처럼 강렬하던 젊은 날의 열정이 세월의 파도 앞에서는 한갓 물거품처럼 사그라져 버린다. 박지도의 노두는 우리네 삶과 사랑에 대한 은유처럼 읽힌다.

강제윤 시인 <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 gilgu1@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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