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근호 기자 ]
지난 7일 태국 국민은 군부에 힘을 실어주는 개헌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며 안정을 택했다. 2006년 탁신 친나왓 총리가 축출된 이후 10여년간 계속된 혼란을 끝내는 게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태국에 진출한 해외 기업도 불확실성이 줄었다며 찬성 61.35%로 개헌이 확정된 선거 결과를 반겼다. 하지만 국민투표 나흘 만에 터진 연쇄 폭탄 테러는 이런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불만을 누르며 억지로 안정을 얻는다 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개헌 찬성이 짧은 기간 안정을 가져올 순 있지만 태국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해결하지 못해 정치적·경제적 도전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개헌은 금이 간 벽에 벽지를 바른 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태국 민주주의 1980년대로 퇴행
태국 민주주의를 1980년대 수준으로 퇴행시켰다는 비난을 받는 새 헌법은 올해 3월 마련됐다. 2014년 5월20일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가 탁신 전 총리 지지파가 다시 정권을 잡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추진한 일이다. 탁신 전 총리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이 2011년 총리가 된 것을 비롯해 탁신파는 2001년 이후 치러진 다섯 번의 총선에서 모두 승리했다.
태국이 절대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뀐 1932년 이후 20번째 헌법인 이번 개정 헌법은 2017년 총선 이후 5년 동안 이어질 민정 이양기에 상원의원 250명 가운데 244명을 최고 군정기구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가 뽑도록 했다. 나머지 6명도 군과 경찰 고위직으로 채워진다. 지금까지는 2007년 개정 헌법에 따라 150명 중 76명은 직선제로, 74명은 상원선임위원회의 임명으로 뽑았다.
총리 선출 방식도 바뀐다. 이전 헌법에서 총리는 하원의원이어야 하며 하원 다수당이 선출했다. 개정안에선 전체 하원 500석 중 5% 이상 의석을 얻은 당은 의원이 아닌 사람을 포함해 3명까지 총리 후보를 추천할 수 있다. 하원 과반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상·하원 합동회의로 선출한다. 군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가 위기 시에는 군 사령관, 경찰청장 등이 포함된 위기관리위원회가 행정과 입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했다.
양극화에 따른 갈등의 불씨 여전
이코노미스트는 “많은 유권자가 개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군부는 반대 의견을 억눌렀다. 최소 120명의 반대파가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TV 토론회도 열리지 않았다. 찬성표를 던진 태국 중산층은 그저 혼란이 끝날 수 있기만을 바랐다. 군부가 탁신의 부정부패만을 부각시켰기 때문에 의회에서 탁신파가 제거되면 세상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혼란의 불씨는 쉽게 꺼지지 않을 전망이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15년 동안 탁신파가 줄곧 선거에서 이긴 것은 방콕의 기득권에 淪?소외 지역 사람들의 불만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방콕과 수도권엔 6700만명의 태국 인구 중 17%만 살고 있지만 공공 지출의 4분의 3이 집중되고 있다. 이 지역에서 정부의 1인당 교육비 지출은 다른 지역보다 4~5배, 의료 지출은 12배 많다. 수도권 지역 소득이 다른 지역보다 5~7배 높은데도 그렇다. 태국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외 지역 민심은 무료 의료, 저금리 대출, 쌀 보조금 등 선심성 정책을 편 탁신 전 총리에게 쏠렸고, 기득권 유지에 위협을 느낀 군부·왕실·엘리트층 연합이 쿠데타로 맞서는 일이 반복됐다.
2014년 0.8%로 떨어진 태국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2.8%로 뛰어올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3.0%, 2017년 3.2% 성장을 전망했다. 5~6%대인 동남아 다른 주변국보다 여전히 낮다. 개헌 후 정치 안정으로 외국인 투자가 살아날 것이란 기대가 있지만 효과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와 FT는 전했다. 태국의 투자 매력이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건비 상승, 노동가능인구 감소, 지체된 교육 수준과 기술 숙련 부족이 문제다.
올 상반기 태국이 받은 외국인직접투자(FDI)는 3억4700만달러로 작년 상반기 대비 92% 줄었다. 최대 투자국인 일본도 베트남과 캄보디아, 미얀마 등 인건비가 싼 주변국으로 투자를 옮기는 추세다. FT는 “태국은 기술로는 한국과 일본에 밀리고, 인건비로는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뒤떨어진다”며 “수출 주도 제조업 붐이 끝난 지금 태국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고 지적했다.
임근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eigen@hankyung.com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