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조선인
미즈노 나오키·문경수 지음 / 한승동 옮김 / 삼천리 / 272쪽│1만5000원
[ 고재연 기자 ]
“반(半)쪽바리(재일동포를 비하하는 말) 이겨버려!”
재일동포 3세 유도선수 안창림(22)은 2011년 재일조선인 대표로 전국체전에 참가했을 때 상대편 코치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다. 그는 큰 상처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일본에서 한국 국적을 유지한 채 유도 선수의 길을 걷는 것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 유도 명문 쓰쿠바대에 들어갔지만 국적이 한국이라는 이유로 규모가 큰 대회에 출전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쓰쿠바대는 그의 일본인 귀화를 추진했지만 안창림은 거부했다. “한국 대표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싶다”는 어릴 적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2014년 2월 홀로 한국에 건너와 용인대에 입학했고, 9개월 만에 소원하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출전해 비록 메달을 따는 데는 실패했지만, 재일동포로서 차별을 이겨내고 조국의 유도 대표로 성장한 도전 스토리는 국민의 가슴을 울렸다.
지금까지 재일동포의 삶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역사의 수난자’나 ‘주변인’으로 그려졌다. 미즈노 나오키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 교수와 문경수 리쓰메이칸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함께 쓴 《재일조선인》에서 이런 시각과는 달리 재일동포를 역사적 주체로 재조명한다. 국가와 민족 간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그들이 국민국가의 틀을 돌파하는 미래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저자들은 신문, 잡지, 기록물 등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재일동포의 사회사를 재구성했다. 1900년대 조선인들은 주로 직업소개소나 청부업자를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남성은 토목 건설 현장이나 탄광에, 여성은 방직공장이나 염색공장에 고용됐다. 먼저 자리잡은 이주민들이 고향의 가족이나 친지에게 일본 일자리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현해탄을 건너가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1910년 2600여명이던 재일동포는 1945년 200만명을 넘어섰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재일동포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도화선이 돼 3·1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재일동포에게는 ‘불령선인(不逞鮮人·후테이센진)’이라는 호칭이 따라붙었다. ‘일본(일왕)으로부터 은혜를 받았음에도 반항하는 괘씸한 조선인’을 뜻하는 단어다. 조선인을 멸시하면서도, 이들을 두려워하던 일본인의 인식이 깔려 있다. 저자들은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 6000여명이 학살된 배경에도 이런 두려움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1950년 6·25전쟁 당시 재일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한 조영진 씨는 “우리 집에 불이 났는데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고 회고했다. 재일 청년 642명은 재일의용군으로 인천상륙작전 등에 투입됐다. 이들 중 상당수가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됐다.
이념과 국가주의의 족쇄 속에서도 그들은 일터와 생활공간에서 교육과 문화를 꽃피웠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와 프로레슬링을 석권한 역도산(1924~1963)은 ‘패전국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일본 국민의 상징이 됐다. 1970년대 전후 세대는 생활인으로서 지역 사회의 현실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1970년 재일동포 2세 박종석은 채용 과정에서 차별한 히타치제작소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이겼다.
저자들은 “혈통주의와 단일국적주의라는 사고방식은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명백하게 무너지고 있다”며 “늘 ‘일본이냐, 한국이냐’의 기로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온 재일조선인의 존재 방식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