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장사상륙작전

입력 2016-08-03 18:23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영화 ‘인천상륙작전’ 관객이 1주일 만에 350만명을 넘었다. 성공확률 5000 대 1의 기적 같은 승리를 가능케 한 첩보부대의 ‘X-RAY 작전’과 ‘켈로부대’ 활약상이 이제야 대중에 알려졌다. 이 영화 덕분일 것이다. 다른 6·25 비사(秘史)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을 위한 또 다른 작전이 동해안에서 극비리에 진행됐다. D데이를 앞두고 북한군 병력을 분산하기 위해 펼친 장사상륙작전이다. 경북 영덕군 장사리에 상륙한 육군 제1유격대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주력부대를 동해안으로 유인함으로써 맥아더의 양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부대원 772명은 대부분 중고생인 10대 학도병이었다. 나이가 너무 어려 군에서 받아주지 않자 떼를 써서 교복 차림으로 참전한 소년병들. 훈련기간은 2주에 불과했다. 무기는 소총 한 자루였고, 양식은 3일분이었다. 이들이 민간 선박 문산호를 타고 해안 가까이 도착한 것은 새벽녘. 태풍 케이지로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뭍에 닿기도 전에 적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수십명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무전기가 바닷물에 젖어 고장나는 통에 지원요청도 할 수 없었다.

나머지 소년병들은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상륙작전을 감행해 교두보를 확보하고 인민군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허를 찔린 적은 대규모 병력이 상륙한 줄 알고 낙동강 전선의 주력부대를 황급히 이곳으로 돌렸다. 학도병들은 전차와 포대를 앞세운 정예군과 맞서 1주일간 혈투를 벌였다. 배가 좌초했으니 철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싸운 결과 270명을 사살하고 4명을 사로잡았다. 이 과정에서 139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다쳤지만, 정규군을 상대로 올린 놀라운 전과였다.

작전이 끝나고 돌아온 학도병들은 그제서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곧 다른 작전에 투입돼 뿔뿔이 흩어졌고 장사상륙작전은 역사 속으로 묻혔다. 작전이 군사기밀이었기에 휴전 이후에도 전모는 가려져 있었다.

이들의 사연은 생존자들이 ‘장사상륙작전 유격동지회’를 결성하면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7년 해병대가 바닷속 문산호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배의 모형이 복원되고 전몰용사위령탑도 세워졌다. 그러나 이 눈물겨운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할 때마다 동해안의 소년병들을 떠올리게 된다. 피흘려 지킨 대한민국이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 1주기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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