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 진압, 백지수표 아니다"…에르도안 철권통치에 제동 건 미국·유럽

입력 2016-07-18 18:00
"국가기관 바이러스 쓸어버리겠다"
터키, 사형제 부활 등 숙청 예고

국제사회, 법치 통한 처벌 촉구


[ 박종서 기자 ]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이스탄불 파티흐 모스크(이슬람사원)에서 엄수된 쿠데타 희생자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오랜 정치적 동지인 에롤 올카크의 관을 앞에 두고 감정이 북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장례식 참석자들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가지는 또렷하게 말했다. 그는 “국가기관에 있는 바이러스를 모두 쓸어버리겠다”고 공언했다. 쿠데타 연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을 예고한 것이다. 데일리메일은 “에르도안이 ‘악어의 눈물’을 보였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서방 외신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피의 숙청’을 맹세했다며 미국과 유럽의 지도자들이 법치를 무시한 터키의 정적 제거 가능성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쿠데타는 군부 척결 위한 신의 선물”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15일 발생한 쿠데타를 6시간 만에 제압하고 장성급 29명 등 군인 2839명, 알파르슬란 알탄 헌법재판관 등 판사와 검사 2744명을 체포했다. 5500여명의 목숨이 에르도안 대통령 손에 달린 셈이다. 군부와 법조계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이른바 세속주의자들이 많아 이슬람주의를 강조하는 에르도안 대통령과 적대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데타 시도에 대해 “군부 내 반정부 세력을 소탕하도록 신이 내린 선물”이라고 표현했으며 사형제도 재도입까지 거론하고 있다.

2003년 총리로 집권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권위주의와 철권 통치로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아왔다. 권력을 위해 언론의 자유를 도외시했고 여성의 권리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민 간 소통을 막기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사용을 억제해온 터라 SNS를 통해 국민들이 쿠데타를 막아내자 ‘SNS에 목숨을 빚지는 아이러니가 나타났다’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술탄(이슬람 최고지도자)’이나 ‘터키의 푸틴’이라는 비판을 듣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방국가 “선출된 독재 정권 경계하라”

쿠데타 세력에 대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강경대응 방침에 미국과 유럽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장마르크 에로 프랑스 외무장관은 “에르도안 대통령이 쿠데타 세력 처벌을 빌미로 정적들의 입을 막는 ‘백지수표’로 사용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도 쿠데타 사후 처리 과정에서 법치를 주문하고 나섰다. 서방 언론들도 같은 목소리다. FT는 “정부가 통제력을 되찾았지만 터키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평가하기에는 거리가 멀다”고 평가했고, 영국 가디언은 “선출된 독재 정권을 경계하라”며 비판했다.

하지만 서방의 주문은 공허하게 울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WSJ는 ‘에르도안의 가치가 유럽의 가치를 이긴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터키의 전략적 가치가 너무 커서 민주주의와 법치를 강조하는 유럽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터키는 유럽행(行)을 원하는 300만명의 난민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에 터키와 관계가 틀어지면 유럽은 다시 대규모 난민 문제에 시달릴 수 있다. 터키는 유럽연합(EU)에 가입하기 위해 유럽 국가의 눈치를 봐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터키가 ‘칼자루’와 ‘꽃놀이패’를 쥐고 있다.

미국도 비슷하다. 미국은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를 격퇴하기 위한 공군기지를 터키에 두고 있다. 인지를릭 공군기지에는 핵폭탄 50여발이 비축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미국에 살고 있는 자신의 정적 펫훌라흐 귈렌의 인도를 요구했을 때 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배경이다.

박종서 기자 cosm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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