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이 급전 대출받을 때 임차인에게 부탁해 은행에 제출
경매 땐 은행이 배당 받아가고 임차인은 보증금 전액을 낙찰자에게 떠넘길 수 있어
얼마 전 분당의 중대형 평형대 아파트가 경매로 나왔다. 향, 층, 입지, 브랜드 모두 나무랄 데 없는 대단지 아파트였다. 두 번의 유찰을 거쳐 당시 최저가는 감정가 대비 64%대. 감정가가 상승기의 시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시세 대비 60%로 낙찰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문제는 대항력 있는 임차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임차인의 보증금 액수가 2억원을 훌쩍 넘으니 낙찰자가 위 보증금을 전액 인수해야 한다면 현재 상태에서 낙찰받으면 오히려 손해였다. 그런데 물건명세서상 공지된 임차인의 확정일자만 놓고 봤을 때는 임차인이 1순위로 보증금을 전액 배당받을 것으로 보이는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필자의 제자 A씨가 낙찰받았다. 물론 임차인은 진정한 임차인이고 당해 경매 절차에서 전액 배당을 받으니 인수할 보증금은 한푼도 없다는 나름의 판단을 거친 뒤였다. 당시 필자는 A씨가 낙찰받은 사실도 모르고 있었는데, 얼마 후 A씨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차분한 성격인 A씨답지 않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져 경매사고를 직감했다.
A씨에 따르면 대출 당시 은행에서는 임차인으로부터 ‘무상임대차각서’를 징구해 두었고 이를 근거로 은행은 곧바로 배당이의 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무상임대차각서가 있다면 신의칙상 은행에는 대항할 수 없으니 배당이의소송은 결국 은행의 승소로 귀결될 것이고, 그렇다면 대항력은 있는데 한푼도 배당받지 못하는 임차인의 보증금을 전액 낙찰자가 떠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법원에서 제공하는 문건접수 내역을 꼼꼼히 검토했다면, 은행에서 무상임대차각서를 받아두었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고 배당배제신청서까지 제출했으니 임차인이 당해 경매 절차에서는 배당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법률전문가가 아니다보니 물건명세서의 기재만으로 전액 배당받는 임차인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A씨를 탓할 수도 없었다.
울먹이는 A씨를 대신해 필자가 경매계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담당계장에게 이런저런 사정 설명을 하고 결국 이 사건에서 낙찰자가 임차인의 보증금을 떠안아야 하는데 그런 내용이 물건명세서에는 전혀 공지가 안 돼 있으니, 매각불허가 결정을 내리고 낙찰자가 보증금을 찾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관련 판례까지 팩스로 넣어주며 설득했더니 신중히 고민해 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다음날 매각불허가결정이 났고, 천만다행으로 제자 A씨는 입찰보증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이 물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궁금해 유료정보 사이트를 검색해보았더니 그 후에도 이 물건은 한 번 더 낙찰됐다. 응찰가도 꽤 높았던 걸 보면 누군가가 A씨와 똑같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호기심에 잔금납부 과정을 계속 지켜봤는데 낙찰자는 결국 불허가 결정을 받지 못하고 잔금을 미납했다. 한 번의 실수로 낙찰자는 피 같은 목돈을 허공에 날려 버린 것이다.
요즘 위장임차인물건과 관련해 ‘무상임대차각서’가 실무상 많이 문제되고 있다. 집주인이 갑자기 급전이 필요해 대출받아야 할 상황인데, 담보로 제공될 집에 대항력 있는 임차인이 거주하게 되면 대출이 많이 안 나오니 집주인이 임차인을 설득해 ‘자신은 진정한 임차인이 아니고 무상으로 거주하는 사람이다’란 내용의 확인서를 받아 은행에 제출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확인서가 ‘무상임대차각서’다. 실제는 진정한 임차인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집주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해 무상임대차각서를 써주는 임차인이 경매실무에서는 적지 않다.
이 무상임대차 각서가 존재하면 일반인들은 무조건 위장임차인이라고 추측하는 경향이 있는데 법리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그들은 진정한 임차인이 맞지만 은행에 무상임차인이라는 신뢰를 줬기 때문에 민사법 대원칙인 ‘신의칙’상 은행에 대해서 진정한 임차인이라는 주장을 하지 못할 뿐이다.
결국 임차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적어도 낙찰자와의 관계에서는 자신이 무상임차인이라는 신뢰를 준 적이 없기 때문에 무상임대차각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증금 전액을 낙찰자에게 떠넘길 수 있는 경우가 있어 실무상 종종 분쟁이 발생하곤 한다.
정충진 < 법무법인 열린 대표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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