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해도 생체인증을 통한 금융 보안이나 결제는 공상과학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술이었습니다. 로봇이 알아서 자산을 관리해주고, 가상현실 속에서 아바타 은행원이 투자 조언을 해주는 일은 영화에서도 '과연 가능할까'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정도였죠. 불과 수년 만에 이런 모습이 우리 현실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정보기술(IT)의 급속한 발전이 금융 생활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는 겁니다. [한경닷컴]은 '테크(기술)가 그리는 금융의 미래'란 주제로 기술 발전이 5년, 10년, 20년 뒤 우리의 금융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지 내다봤습니다. 달라질 금융 라이프, 한번 상상해볼까요. [편집자주]
[ 권민경 기자 ]
지난 한 주 간 세계의 눈은 '영국'에 쏠렸습니다. 설마 설마 했던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가 현실이 되면서 세계 정치와 경제가 대혼란에 빠졌죠.
당장 미국과 유럽, 아시아 증시가 크게 흔들렸고 외환 시장도 요동쳤습니다. 주요국 정상들은 브렉시트에 따른 후폭풍을 진화하기 위해 글로벌 '공조'를 강조하며 분주하게 대응에 나섰죠.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영국은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부진한 세계 경제에 영국이 불안과 혼란, 불확실성을 더했다는 지적입니다.
잠깐 화제를 돌려보죠. 2003년 개봉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영국은 작지만 위대한 나라입니다.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즈, 숀 코너리, 해리포터의 나라입니다.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 발도 있고요. 아 왼발도 있군요."(We may be a small country, but we're a great one, too. The country of Shakespeare, Churchill, the Beatles, Sean Connery, Harry Potter. David Beckham's right foot. David Beckham's left foot, come to that.")
당시에는 꽤나 사랑받았던 대사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빛바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 더하자면 영국은 '금융'의 나라입니다. 미국 뉴욕과 더불어 영국 런던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죠.
일부에서는 브렉시트 이후 영국 금융이 가진 위상이 예전과 같지 못할 것이라며 유럽의 다른 국가 혹은 중국 상하이 등으로 금융 중심이 옮겨갈 것이란 예상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전후로 [한경닷컴]의 세 기자가 영국 런던을 찾았습니다. 브렉시트를 한 풀 걷어내고 본 영국 금융의 모습, 런던 한 가운데 자리잡은 금융 중심지 '더 시티'(City of London)에서 확인해봤습니다.
더 시티는 전체 면적이 1평방마일(약 2.6㎢) 로 크지 않지만 역사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런던을 대표하는 곳입니다.
영국에서는 더 시티를 중심으로 금융 분야에 첨단 기술을 도입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 금융 회사들이 열을 올리고 있는 '핀테크'(금융+테크)에서도 가장 앞서가고 있죠. 지난해 영국 내에서 핀테크로 인해 발생한 매출만 65억파운드, 우리 돈 11조230억원이나 됩니다.
영국 최대 보험그룹인 '로이즈' 본사를 우선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넥타이를 맨 수많은 보험맨의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일하는 풍경이 색다릅니다.
온라인이나 전화 상이 아닌 서로 마주보고 앉아 얘기를 나누고, 컴퓨터보다는 종이에 써가면서 설명합니다.
로이즈는 선박이나 항공 등 사고 위험이 큰 보험을 주로 다루다 보니 '신뢰'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며 이같은 전통적인 사업 방식을 고집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계약 상대방이 믿을 만 한 지 아닌지는 얼굴과 눈빛을 직접 보고 말해야 알 수 있다는 거죠.
수긍이 가는 대목이긴 한데, 애초에 기대했던 모습은 아닙니다. 입구에 들어서면 홍채 인식으로 출입을 통제하고 가상현실(VR)로 구현한 가상지점에서 비대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들을 상상했으니까요.
로이즈그룹 회원사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코리안리 보험의 유준하 소장은 이런 설명을 합니다.
"로이즈 내부에서도 디지털 환경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술 발전이 금융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옛 것'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는 거죠. 경영진들은 '신뢰'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키되 어떻게 혁신과 변화를 꾀할 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로이즈 본사 건물은 앞과 뒤가 꽤 다르게 지어져 있습니다. 뒷쪽에서 보면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몇 백년 됨직한 건축 양식이지만 앞과 옆은 미래 세계에서 온 듯 하죠. 건물 내부설비시설에 해당하는 배관 등을 전부 밖으로 뺐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전통과 미래의 조합일까요.
1층 사무실이 나무 책상으로 이루어진 다소 고루한 모습이라면 층수가 올라갈수록 최신식 사무 가구를 갖춰 점점 세련(?)돼 집니다. 윗층에 있는 사무실을 흔히 '이케아(스웨덴 가구 브랜드)룸' 이라고 부른답니다.
유 소장은 로이즈가 자리하고 있는 이곳 '더 시티'의 지리적, 인적 환경이 기술 기반 금융으로의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이라고 꼽습니다.
실제 더 시티의 중심부에는 금융기업들이 몰려있고, 주변부로는 다양한 정보기술 기업들이 늘어서 있습니다. 새롭게 생겨난 빌딩들은 각양각색의 '별명'도 가지고 있고요.
바로 '테크 시티' 인데요. 금융과 정 릴茱?분야의 다양한 정보가 인적, 물적 기반을 따라 오갈 수 있는 환경인거죠. 영국 정부는 2010년 '더 시티' 안에 '테크 시티'를 조성합니다. 이곳은 핀테크 스타트업 단지로 5000개 이상의 창업 기업들이 밀집해 있습니다.
테크 시티가 만들어진 이후 영국의 핀테크 거래 규모는 3배 이상 늘었다고 하네요. 테크 시티는 최근 핀테크뿐만 아니라 사물인터넷(IoT) 등에 대한 지원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영국 금융 변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이번에는 톰슨 로이터를 찾았습니다. 전 세계 금융 데이터를 수집하고 판매하는 이곳도 최근 기술 혁신으로 데이터 사업에 있어서 큰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톰슨 로이터에서 만난 마이크 포웰 전무는 금융회사 간 또는 금융회사와 IT 회사 간 '협업'이 영국을 금융 혁신 강국으로 만드는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런던은 핀테크 허브가 되기에 좋은 곳이죠. 금융회사, 정보기술 기업 등 다양한 회사들이 서로를 지원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대형 금융회사들은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이나 정보기술 기업과의 협업을 통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큐베이팅 프로그램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건 대형은행인 바클레이즈입니다.
바클레이즈는 2014년 6월부터 '액셀러레이터'란 프로그램을 가동해 신생 정보기술 기업을 후원하고 이들과 협업하고 있죠.
이들을 일종의 혁신 연구소로 활용하는 겁니다. 하나의 프로그램에는 보통 10개 안팎의 기업이 들어갑니다.
바클레이즈의 최고기술책임자(CTO)인 마이클 하테는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액셀러레이터는) 새로운 사업 모델과 상품, 서비스를 만들 수 있도록 빠른 실험과 장기적인 협력 관계를 통해 그 가치를 창출하죠."
대형은행과 정보기술 기업과의 협업, 금융업과 IT업 간 경계가 심한 한국의 경우에 비춰보면 머릿 속에 확 와닿는 풍경은 아닙니다.
금융감독원 런던 사무소의 정인화 소장은 업권 간의 긴밀한 협업과 자유로운 경쟁을 중요시하는 인식이 영국에서의 빠른 금융 변화를 일으키는 요인이라고 말합니다.
"영국은 금융 산업에서 경쟁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있어 모든 게 다 경쟁입니다. 새로운 IT 스타트업들이 금융 서비스에 진출하는 걸 기존 금융회사들이 경계하고 막는 일은 있을 수 없죠."
실제 금융규제당국인 영국 금융업무감독청(FCA)에서도 강조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바로 '혁신'과 '경쟁'이죠. 금융이냐 기술이냐의 문제가 아닌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혁신과 이를 위한 경쟁을 최우선에 두는 겁니다.
☞ [테크가 그리는 금융의 미래 ②] P2P에서 로봇을 넘어 VR까지…금융과 IT경계를 넘어
영국 런던= 권민경/장세희 한경닷컴 기자 k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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