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애플이 다시 삼성에 손 내민 까닭은?

입력 2016-06-24 17:41
수정 2016-06-24 17:41
[ 고기완 기자 ] 2012년 9월 애플은 삼성 메모리 반도체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2011년부터 애플은 삼성을 상대로 특허 소송을 벌이면서 삼성 반도체를 의도적으로 쓰지 않았다. 대만 등 다른 나라에서 반도체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애플이 휴대폰 시장에서 거의 유일하게 견제하고 있는 상대가 삼성이다. 반도체 기술과 휴대폰 제조기술에서 삼성만큼 뛰어난 글로벌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거부할 수 없는 '삼성 기술'의 유혹

아이폰5부터 삼성 메모리를 사용하지 않았던 애플이 최근 돌연 태도를 바꾸고 삼성에 손을 내밀었다. 오는 9월 출시될 아이폰7에 삼성전자의 3차원(3D)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사용할 테니 납품해달라고 한 듯하다. 콧대가 높기로 소문 난 애플이 웬일? 애플이 약 4년 만에 삼성 메모리 반도체를 달라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3D 낸드 플래시 메모리칩이라는 압도적인 삼성 기술력이 애플을 움직이게 했다는 분석이 많다. 애플은 요즘 이렇다 할 신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조차 “애플의 창의력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정도다. 애플은 아이폰7을 초고속, 초소형, 초대용량 폰으로 구현한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이를 위해선 반드시 좋은 칩을 써야 한다. 반도체 기술력의 핵심은 ‘크기는 작고, 속도와 용량은 큰' 칩을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최근 삼성이 내놓은 3D 낸드 플래시 메모리칩은 48단 높이다. 말이 48단이지 건물처럼 눈으로 보기에도 높다는 의미는 아니다. 얇으면서도 48단 높이다. 그래야 물리적으로 속도와 용량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 기술은 현재 삼성만 가지고 있다. 이 메모리칩은 손톱보다 작다. 그렇지만 연속해서 읽는 속도는 보통의 마이크로 SD카드보다 9배가량 빠르다. 5기가바이트(GB) 크기의 풀HD 영화 1편을 11초 만에 전송한다. 애플이 원하는 3박자(초고속, 초소형, 초대용량)에 최적화돼 있는 셈이다. 삼성의 반도체 기술력은 세계 톱이다.

애플은 두 가지를 생각했을 법하다. 첫째는 아이폰을 진화시켜야 한다는 요구다. 최근 아이폰 시리즈는 삼성 갤럭시 시리즈에 밀리고 있다. 세계 휴대폰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삼성에 빼앗긴 이유도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가 원인이다. 애플은 휴대폰이라는 하드웨어에서라도 삼성에 밀리면 안 되는 신세다. 둘째는 삼성이 3D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창작한 새로운 휴대폰을 내놓을 경우도 상정해봤을 가능성이 높다. 초고속, 초소형, 초대용량 칩이 삼성 휴대폰에만 장착될 경우 휴대폰 시장은 삼성 위주로 흘러갈 공산이 높다.

애플을 굴복시킨 것은 삼성의 ‘초격차 주의’의 실현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기존 반도체 시장은 이미 많은 경쟁사들 간 치킨게임으로 포화돼 있다. 미국 일본 대만 중국 반도체 기업들이 모두 뛰어들어 ‘재미’를 보기 힘든 상태다. 삼성은 이런 시장에서 벗어나 경쟁 기업들을 기술력으로 완전히 따돌리는 ‘초격차 주의’를 추구해야 할 상황이다.

'치킨게임'은 옛말…이젠 '초격차 전략'

시장 선점은 여러가지 면에서 유리하다. 경쟁자들이 따라오기 전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가격을 주도할 수 있다. 경쟁 기업이 후발 주자로 많은 투자를 해 양산 체제에 들어서면 가격을 내려 무너뜨릴 수 있다. 반도체는 엄청난 규모의 투자를 해야 하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새로운 시장을 보고 수조 원의 돈을 투자했는데, 선발 주자가 가격을 내리면 적자에 허덕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글로벌 시장의 냉혹한 현실이다. 삼성은 도시바, 마이크론뿐만 아니라 인텔, 중국 XMC 등 새로 뛰어든 경쟁사들까지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한다는 전략이다.

삼성이 1등 DNA를 추구하는 이유다. 단순한 1등이 아니다. 2등을 확실히 따돌릴 정도의 압도적 1등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초격차 1위 전략’이다. 삼성은 이 전략으로 경쟁에서 살아남았다. 삼성은 1999년 D램 시장에서 기술 주도권을 쥐어 제품을 먼저 개발해 비싼 값에 팔았다. D램 시장에 진입한 경쟁사들이 쫓아오자 삼성전자는 물량을 대거 풀어 경쟁사들이 개발비도 못 건지게 만드는 ‘초격차 전략’으로 치킨게임을 끝냈다.

치킨게임은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게임이론 모델이다. 선수 A와 B가 자동차를 타고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생각하기로 하자. 두 선수 중 겁이 나서 먼저 피하는 사람은 겁쟁이(chicken)로 낙인 찍혀 체면을 잃게 된다. 둘 다 피하지 않으면 모두 죽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상황은 반도체 시장에 만연했다.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20여개에 달하는 D램 업체가 치열한 경쟁을 했다. 지금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3강 체제로 굳어졌다. 치킨게임의 승자는 ‘승자 효과’를 누리며 점유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삼성전자는 D램 시장에서 펼친 초격차 전략을 3D 낸드플래시 메모리 시장에도 그대로 적용할 예정이다.


3D 낸드 만들기 어렵나?…삼성, 크로스토크 문제 해결

평면(2D) 낸드 공정 기술은 물리적으로 10나노미터(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반도체의 회로선 폭)대에서 한계를 맞는다. 낸드 칩 사이즈를 작게 만들면 셀 간 거리가 매우 좁아지게 된다. 이때 전압을 주면 해당 셀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인접한 셀에 영향을 준다.

이것을 ‘크로스토크(crosstalk)’라고 한다. 일종의 간섭 현상이다. 이는 심각한 오작동을 유발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3차원(3D) 낸드가 개발됐다. 3D 낸드는 평면 낸드의 회로를 수직으로 세운 제품이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평면 낸드가 일정한 면적의 땅에 1층 주택을 최대한 작게 만들고 빽빽하게 붙여 짓는 것이라면 3D 낸드는 고층 아파트를 짓는 것이다.

밀도가 높은 1층 주택들은 인접한 집의 소음이 들리고 집의 내구성도 약하다. 하지만 고층 아파트는 층수를 올리면 집적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빽빽하게 집을 지을 필요도 없고,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어서 내구성이 훨씬 높아진다. 자연히 크로스토크 현상도 사라진다.

층수는 이론적으로 1000층까지 가능하며 집적도의 한계도 사라진다. 삼성전자는 작년 4분기부터 48단 3D 낸드를 생산하고 있으며 내년 초엔 64단 제품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전망이다.

최용식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인턴기자 chys@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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