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태 < 지평 베트남법인 호찌민 지사 변호사 >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은 자녀들을 등교시킨 뒤 출근하는 차 안에서 일과를 시작한다. 스마트폰을 열자 수신 이메일 숫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월요일 아침에는 관심 분야별로 뉴스를 스크랩해서 보내주는 본사 지식지원팀의 메일을 비롯해 고객의 이메일이 쇄도한다. 베트남 관련 한국 언론보도 중 지난주 계약을 맺은 고객의 인수합병(M&A) 건이 가장 눈에 띈다. 고객이 상장사이다 보니 벌써 공시하고 홍보자료를 배포했나보다. 몇 달간 공들여 실사와 계약 협상을 하던 중 갑작스레 다른 한국 기업이 양도인 측에 접근해 가격을 올렸던 위기의 순간이 문득 떠오른다.
바로 삭제 또는 회신할 메일들을 처리하던 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음이 연거푸 울려댄다. 베트남 현지시간으론 오전 8시지만 서울은 이미 업무가 시작됐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나와 상대가 동 시간대를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하지만 지구의 서쪽에 근무하는 주재원들은 동쪽 사람의 시계에 맞춰야 하는 멍에를 안고 산다.
사무실에 도착해 노트북이 부팅되는 몇 초의 시간 동안 즐기는 커피 한 잔의 여유는 하루 중 가장 바쁜 오전 일과를 버틸 수 있게 해준다. 보안 암호를 입력하고 이메일 창을 띄우면 그새 새로운 메일이 10여통 또 들어와 있다. 먼저 현지 변호사 동료들에게 리서치를 맡기거나 협업할 것을 추려 내부회의를 연다. 고객의 질의 내용을 전달하고 리서치해야 할 법적 이슈에 대해 토론한 뒤 역할을 분배해준다. 거래 구조가 복잡한 계약서는 내가 작성하기로 했다.
베트남 현지 변호사들에게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것은 한국에서는 이런 법령에 따라 이런 사업을 할 수 있는데, 베트남은 어떤지에 관한 질문이다. 한라산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한라산을 말로 설명해주고는 하롱베이(Ha Long Bay)와 비교분석을 요구하는 일일진대, 그 놀라운 일을 대수롭지 않게 해내는 동료들이 존경스럽다. 현지 변호사 모두가 10년 전 처음 지평 베트남을 설립한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같이 해온 창립 동지여서 그런지 호흡도 잘 맞고 더욱 믿음직스럽다.
회의실에서 책상으로 돌아와보니 사무실 전화로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 있다. 하나는 인도네시아 지사장, 다른 하나는 서울 본사, 나머지 하나는 지난주 제안서를 제출한 고객사 담당자다. 회신 순서는 항상 고객 먼저. 제안서 내용이 마음에 드는데 서울에서 임원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해달라고 한다. 출장 가기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고 대신 본사의 베트남팀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것으로 협의하고서 바로 본사 변호사들을 소개하는 연락을 돌린다.
베트남 업무를 꾸준히 지원해준 M&A, 금융 분야 파트너 변호사 선배들에게 프레젠테이션을 부탁하니 마음이 푸근하다. 인 뎨謬첸?지사장과 다른 본사 전화는 다음주에 예정된 금융기관 세미나 준비를 협의하기 위한 내용. 해외 진출을 고려하는 한국 기업은 베트남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인근 동남아 지역을 포함해 여러 지역을 같이 검토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다 보니 가장 많은 해외 지사를 둔 우리에게 관심 분야에 대한 동남아 전 지역의 법제 강의나 자문 제안을 요청하는 고객이 부쩍 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사의 해외 담당 팀뿐만 아니라 하노이, 상하이, 프놈펜, 비엔티안, 양곤, 자카르타, 두바이, 테헤란, 모스크바에 나가 있는 동료들만큼 든든한 후원자가 없다.
어느덧 고객과 약속한 점심시간. 현지 주재원 사회가 좁은 데다 대부분 한 회사에 한국인 한두 명이 나와 있는 실정이어서 점심, 저녁 식사를 같이하는 일이 잦다. 모두 친구도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살다 보니 먼저 업무로 다가가지만 어느 순간 서로 의지하는 친구가 된다.
오늘 점심을 같이하는 분도 고객사 관리부장님. 본사 감사팀이 출장온다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직원이 수백 명인 현지법인에 한국인 주재원은 3명. 영업하기에도 바쁜데 감사팀이 요구하는 자료가 산더미다. 현지인 관리자에게는 묻지 않고 한국인 주재원만 찾아 다른 일을 못 한다고 한다. 전임자 때 일을 물을라치면 자료 찾기도 힘들고 전후 사정을 몰라 답하기 어려운 일도 많아서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베트남 주재 6년차가 되다 보니 고객사 담당자보다 내가 회사 히스토리(내력)를 더 잘 아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은퇴하면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사를 써볼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오후에는 고객 회의가 두 건 잡혀 있다. 먼저 다른 고객의 소개로 遮?온 분은 현지법인을 설립하려고 했다. 자문료를 제안했더니 오전에 상담받은 한국인 컨설턴트나 로컬(베트남) 로펌보다 비싸다며 깎아달라고 한다. 베트남에서 법인을 설립하려면 외국인 투자 가능성과 출자 한도 등 검토할 사항이 많다. 인허가 신청 서류도 30가지 이상 제출해야 한다. 비전문가나 커뮤니케이션(소통)이 어려운 로컬 로펌에서 만족할 만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음 미팅은 오랜 고객사의 분쟁 상담. 그룹의 11개 전 계열사 현지법인을 자문해오고 있는데 최근 동종 업계의 불황에 따른 미수 채권 분쟁으로 걱정이 많다.
오후 4시가 넘어가자 이메일과 전화가 뜸해진다. 아무래도 서울 업무시간이 끝나고, 현지에서도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니 그런가보다. 그렇다고 여유를 부릴 수 있는 행운은 없다. 이때부터 나의 서류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과 시간 중에는 이메일, 전화, 회의 등으로 차분히 생각하고 검토할 시간이 없어 당장 급한 가벼운 일을 처리한다.
오늘은 저녁에 영화 개봉 시사회를 가야 해서 마음이 더 바쁘다. 한국 고객이 베트남 회사와 공동제작한 영화가 연속적으로 현지 역대 흥행 기록을 세웠다. 우리가 처음 계약부터 최종 성과 분배까지 전 과정 자문을 받았다는 점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기 전 엔딩 크레디트에서 본 지평의 로고는 한국 기업에 대한 긍지와 고객에 대한 감사, 베트남에 나온 보람을 버무린 감동 그 자체다.
정정태 < 지평 베트남법인 호찌민 지사 변호사 >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한국경제 & hankyung.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