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발의 법안 178건 조사해보니
절반 넘는 91개 법안이 내용 같거나 자구만 수정
'노인복지청 신설'은 4명이 '붕어빵' 발의
재추진 필요성 있다 해도 달라진 여건 반영 안해
'건수 올리기 입법' 변질
[ 임현우 기자 ]
20대 국회가 문을 연 뒤 쏟아진 의원 발의 법안의 절반 이상이 19대 국회에서 폐기한 법안을 ‘재활용’한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경제신문이 12일까지 국회사무처가 접수한 의원 발의 법안 178건을 조사한 결과 91건(51.1%)이 19대 국회에 제출한 법안과 똑같거나, 일부 자구만 고쳐 재발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 3선 중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화재예방법 개정안’은 19대 국회 때 박남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낸 법안과 같았고, ‘악취방지법 개정안’은 부좌현 전 국민의당 의원 법안과 99% 일치했다. 그가 함께 발의한 ‘마리나항만법 개정안’과 ‘장애인·노인·임산부 편의증진법 개정안’은 새누리당 윤명희 전 의원, 이상일 전 의원 안을 몇 글자만 손질해 재발의했다.
이찬열 더민주 의원은 현재까지 20대 국회의원 중 가장 많은 16건을 발의했으나 이 중 9건이 재활용 법안이다.
자신이 19대 때 낸 ‘국경일법 개정안’ ‘유료도로법 개정안’ ‘지방재정법 개정안’ 등과 같은 당 장하나 전 의원이 대표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안’ 등을 다시 냈다. 이 의원 측은 “지난 국회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폐기됐지만 사회적으로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법안들을 재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폐기된 법안을 재발의하는 데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사안을 책임감 있게 추진하는 것은 긍정적”이라는 시각이 있는 반면 “달라진 사회 환경 등을 반영하지 않은 채 입법 실적을 위한 형식적 입법”이란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보건복지부 산하에 노인복지청을 신설하자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은 무려 네 건이 중복 발의됐다. 19대 국회에서 폐기된 법안이지만 새누리당 소속 이종배·홍문표·경대수·이명수 의원이 20대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앞다퉈 재발의했다.
한 의원실 관계자는 “여러 의원이 비슷한 법안을 따로 발의하면 상임위원회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흡수하지만 법안 가결 실적은 모든 의원에게 주기 때문에 법안 발의 경쟁을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의원들의 ‘실적 채우기식’ 입법을 걸러낼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법안 발의와 홍보 단계에만 힘을 쏟고 실제 통과까지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의원이 있다”며 “자구 몇 개만 고치는 수준의 발의는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배점을 크 ?줄이는 방식으로 정당과 시민단체의 의원 평가 방식을 개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산업계에 큰 영향을 미칠 여당의 경제활성화 법안과 야당의 경제민주화 법안도 상당수가 19대 국회의 ‘재탕’이다. 새누리당은 19대에서 처리하지 못한 노동개혁 4법(근로기준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고용보험법·파견법), 서비스산업발전특별법, 규제개혁특별법, 규제프리존특별법, 사이버테러방지법을 소속 의원 전원의 서명을 받아 재발의했다. 더민주 의원들이 내놓은 유통산업발전법, 제조물책임법, 세법 개정안 등도 폐기된 19대 법안을 그대로 옮겨온 것들이다.
이선미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팀장은 “법안을 발의한 뒤 다른 의원이나 이해관계자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내용을 다듬어가는 것이 국회의원의 정상적인 업무”라며 “이전 국회의 의안을 그대로 재탕하는 것은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자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임현우 기자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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