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헌법 제정 참여, 연방파 지도자. 연방은행 설립자, 뉴욕포스트 설립자, 해안경비대 창설자, 결투와 죽음…. 이 모든 게 ‘건국의 아버지’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의 이야기다. 풍운아 해밀턴의 일생이 최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새삼 재조명되고 있다.
해밀턴은 1757년(일설엔 1755년)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곧바로 세상을 떠났고 열세 살 때 어머니마저 사망해 불우하게 자랐다. 그의 재능과 두뇌를 높이 산 동네유지들이 뉴욕 킹스칼리지(현재 컬럼비아대)로 유학시켜 인재로 키웠다.
해밀턴은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의 최측근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워싱턴은 1789년 초대 재무장관에 33세의 해밀턴을 발탁했다. 해밀턴은 5년 반 재임하며 중앙은행 격인 연방은행을 설립하고 독립전쟁으로 빚더미인 재정을 회생시켰다. 국채를 액면가로 상환하고 주채(州債)를 연방정부가 인수해 신용을 회복하고 금융·자본시장 토대를 다졌다. 그 공로로 미 재무부 앞에 그의 동상이 있고, 대통령이 아니면서도 10달러 지폐 인물이 됐다.
그러나 정치일생은 순탄치 않았다. 해밀턴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향하는 연방파로, 북부 도시와 상공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민주주의란 국민의 변덕과 충동적인 분위기에 좌우되기 쉽다고 봤다. 반면 남부, 농촌 기반의 반(反)연방파 토머스 제퍼슨은 정부가 강해지면 인민의 권리가 작아진다며 정부 권한축소를 주장했다. 프랑스혁명(1789년)을 놓고도 해밀턴은 대중의 폭동, 제퍼슨은 고귀한 투쟁으로 상반된 평가를 내렸다. 두 당파의 대립은 50년 뒤 남북전쟁으로 연결됐고 훗날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체제를 형성했다.
정작 해밀턴의 죽음은 허망했다. 1804년 사사건건 대립하던 애런 버 부통령과의 결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했다. 200년이 지난 2004년 양가 후손들이 결투를 재연하고 화해했다고 한다. 해밀턴의 전기에 감명받은 극작가 겸 배우 린 마누엘 미란다가 뮤지컬 ‘해밀턴’을 2014년 오프브로드웨이에 올린 이래 전회·전석 매진이라고 한다. 제작사 측은 암표 방지를 위해 입장권 가격을 내년부터 139~475달러에서 177~849달러로 올릴 예정이다. 티켓값이 최고 100만원인 셈이다.
이 작품은 극적 스토리에다 음악이 압권이라는 평가다. 미란다가 작곡과 해밀턴 역을 맡았다. 다양한 뮤지컬 명곡들을 피처링했고 록, 힙합, 랩까지 아우른다. 예컨대 해밀턴과 제퍼슨의 대립은 랩 배틀로 재연했다. 가격이 뛰기 전에 보고 싶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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