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 에티오피아 노병의 슬픈 이야기

입력 2016-05-29 13:36


(아디스아바바=장진모 기자) 6.25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대학을 갓 졸업한 스물 두살의 청년 멜레세 테세매. 그는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황실근위대에 입대했다. 셀라시에 황제는 근위대 가운데 자원 병력을 중심으로 6.25 전쟁에 파병할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걍뉴(Kangnew)’ 부대로 명명했다. 강뉴는 에티오피아 말로 ‘혼돈에서 질서를 확립하다’ ‘격파하다’라는 뜻. 멜레세는 1952년 3월 29일 강뉴2대대 제4중대 제2소대장으로 배를 타고 1개월여 긴 여정 끝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에게 닥친 것은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그로부터 64년이 흐른 지난 27일. 85세의 노병은 아디스아바바의 한국전 참전기념공원에서 열린 ‘제65주년 한국전 참전 기념식’에 참전용사회장으로 참석했다. 노병은 기자에게 “한국에 참전하러 가기까지 너무 먼 길이었다. 처음에 한국에 도착했을 때 기후가 맞지 않아 어려웠고, 두렵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때는 황폐한 모습만 봤다. 그런데 몇 해 전에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는 많이 발전된 모습을 보니 너무 뿌듯했다”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저희들의 희생이 값지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고 했다.

1952년 7월, 소대장 멜레세는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중공군 포로 2명을 생포하고 이듬해 4월에는 중공군 포로 2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려 미국으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를 비롯한 강뉴 대대원들은 화천 철원 김화 등 최전방 산악지대에 배치돼 200회 이상 전투에서 대부분 승리했다. 참전병력 3518명(연인원) 가운데 122명 전사, 536명 부상자 외에 단 한명의 포로나 실종자가 발생하지 않은 용맹스런 전과를 올렸다.

멜레세는 1953년 5월 에티오피아로 귀국 후 황제 경호원을 거쳐 대대장으로 진급했다. 엘리트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74년에 멩기스투의 쿠데타가 발발하기 직전에 탱크 여단장까지 임명됐지만 공산정권 집권 후 강제 퇴역되는 불운을 겪었다.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한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은 1974~1991년까지 지속된 멩기스투 공산정권 치하에서 온갖 핍박과 천대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멜레세 할아버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 보다 더 잘 살았던 에티오피아는 지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619달러(IMF 2015기준)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한다.

우리 정부와 민간에서는 에티오피아 참전용사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1996년부터 민관협의체 등을 구성해 경제적 지원을 시작했다. 2010년에 공무원 봉급의 우수리(1000원 미만) 모금 활동으로 매년 600명의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후손들에게 월 3만원의 장학금 지급, 2012년부터 생존 참전용사에 월 5만원 상당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명성교회는 2003년부터 아디스아바바에 명성기독병원을 개원해 참전용사 본인은 진료비 면제 등의 혜택을, 2012년에는 의과대학을 개냘?참전용사 후손 특별전형으로 2명의 장학생에게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지원하고 있다. LG그룹은 2014년에 ‘희망 직업학교’를 개설해 참전용사 후손을 우선 선발하고 있다.

에티오피아가 우리나라의 혈맹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아프리카 정상외교 첫 순방국가로 에티오피아를 선택한 이유다. 박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에서 여든이 넘은 참전용사들을 만나 악수하면서 감사의 뜻을 전했다. 박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 당시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하게 지상군을 파병해준 나라“라며 ”여러분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전쟁의 폐혜를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여러분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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