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중국 문화대혁명 50주년…인간성 유린한 '암흑의 역사'

입력 2016-05-20 20:03
올해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50주년(시작점 기준)을 맞는 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은 겉으론 ‘문화’라는 명분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이 장기 집권을 위해 벌인 ‘정치 자작극’ 성격이 짙다. 사회주의 혁명이 1960년대 들어 성과를 내지 못하자 마오쩌둥이 자신의 떨어진 위상을 높이기 위해 ‘문화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정적들을 제거한 운동이 문화대혁명이다.

문화대혁명은 낡은 사상, 낡은 제도, 낡은 문화를 척결하자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상을 뿌리뽑는다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적 사상을 가진 인사들을 제거한 것이 본질이다.

사회주의 사상가 마오쩌둥을 따르는 세력들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젊은 학생들로 홍위병을 구성해 각종 문화재와 예술품을 파괴하고 반사회주의혁명 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을 자아비판대에 올렸다. 심지어 일부 지식인은 홍위병인 아들의 신고로 당에 붙들려가 자아비판대에 서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조직적 저항이 거세지고 홍위병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자 한때 중국은 무정부 상태가 돼 인민해방군이 개입하기도 했다. 그 결과 수백만명의 관리와 지식인, 학자가 목숨을 잃고 문화재와 예술품이 파괴됐다.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으로 막을 내린다. 마오쩌둥 사망 후 집권한 덩샤오핑(鄧小平)?마오쩌둥과 달리 실용주의 노선을 펼쳤다. 그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주장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 살도록 하면 된다는 게 그의 통치철학이었다. 덩샤오핑은 농민들이 일부 경작지를 스스로 경작해 수확한 농산물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부분적으로 사유재산제도를 도입했다. 그 결과 농민의 소득이 늘어났으며 중국은 이를 기반으로 시장경제를 확대 도입하게 됐다. 오늘날 중국이 높은 경제성장을 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문화대혁명은 중국의 불행한 역사다. 중국 공산당은 1981년 6월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을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로 규정했다. 사회주의가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이 무리하게 밀어붙인 잘못된 정책이었다고 정리한 것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문화대혁명을 인간 평등을 위한 사건으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심지어 일부 좌파 학자들은 문화대혁명을 미화하기도 한다.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이던 고(故) 리영희 씨는 《8억인과의 대화》에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4, 5면에서 중국 문화대혁명의 구체적 내용과 정치 지도자들을 상세히 살펴보자.

신동열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shin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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