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히로히토 ‘포츠담 선언’ 수용
1945년 8월15일 오전, 서울 곳곳에 긴급 상황을 알리는 벽보가 붙었습니다. 낮 12시에 중대 방송이 있으니 모든 국민은 반드시 들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벽보까지 붙이며 알려야 하는 중대한 상황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낮 12시, 국민들은 라디오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왕 히로히토가 일본이 항복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기쁨을 알리는 소리이기도 했지요.
“…… 나는 일본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개국에 그 공동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했다. …… 그대들 신민은 나의 뜻을 받들어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왕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공동 선언’은 1945년 7월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입니다. 이 선언은 독일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열린 회담 결과 만들어졌지요. 포츠담 선언에는 일본에 대한 항복 권고, 전쟁이 끝난 뒤 일본의 처리 문제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일본과 함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와 독일은 일찌감치 항복했습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될 때 일본은 홀로 남아 연합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항복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은 ‘전쟁의 괴로움’을 빨리 끝내기 위해 엄청난 결정을 했습니다.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기로 한 것입니다.
8월6일과 9일,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이 터졌습니다. 그제서야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였지요. 소련은 8월8일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습니다. 소련은 일본이 이미 항복할 수밖에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슬쩍 끼어들어 승전국 행세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어쨌든 일본은 항복했고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해방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기뻐하면서도 놀라워했습니다. 해방이 ‘도둑같이 뜻밖에 찾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해방이 연합군의 힘, 즉 남의 힘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지요. 당시 나라 안팎에서는 많은 분이 조국 해방을 위해 밤낮을 안 가리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노력과 연합군의 힘이 합해져 일본을 몰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독립 운동은 주로 나라 밖에서 이뤄졌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일본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독립 운동을 펼치기 어려웠지요. 대표적인 독립 운동으로 중국 충칭의 임시 정부와 미국 주미 외교위원회 활동을 꼽을 수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충칭으로 근거지를 옮긴 임시 정부는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만들어 훈련시키고 있었습니다. 또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에 선전 포고도 했지요. 임시 정부는 광복군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일본군을 무찌르는 ?힘을 보태려고 준비했지만 계획보다 일본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그 힘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소련이 내려오면 더 위험” 경고
미국의 주미 외교위원회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 회의장에 다니며 우리의 독립을 호소했지요. 하지만 그때까지 일본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미국은 이를 무시했습니다. 1941년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해 12월 일본이 미국을 공격했습니다. 그 후 이 책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지요.
이승만은 공산 국가인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오면 큰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도 미국에 경고했습니다. 소련을 막으려면 임시 정부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지만 미국은 이 역시 외면했습니다. 그때까지 소련은 미국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치르는 나라였기 때문이지요.
이승만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의 소리’라는 방송을 통해 고국의 동포들에게 희망의 소리를 전했습니다.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고 우리 임시 정부가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이뤄진 이런 노력에 힘입어 우리 민족은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이었지요. 소련은 8월9일부터 군대를 움직여 거침없이 우리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소련은 한반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기에 이렇게 빠르게 군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38선 렙?버린 소련
그에 비해 미군은 소련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에 한반도로 들어오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때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갈 뻔한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그 급박한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나누어 한반도에 들어오자고 소련에 제안했습니다. 소련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8월 말에는 38선을 막았습니다. 원래 38선은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를 구분 짓기 위한 단순한 경계선이었지요. 그런데 소련이 그곳에 철조망을 치고 길을 끊어버렸습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를 괴롭히는 남북한 분단 상황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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