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권력 동원해 부실기업 살리는데 무슨 기업가 정신이 싹트겠나"

입력 2016-05-06 18:13
퇴임 앞둔 박희재 산업부 R&D전략기획단장

부채비율 80~90% 넘으면 중소기업엔 대출회수 나오는데
부실기업 나랏돈으로 지원

국·과별 예산 절대 양보않는 공직 '칸막이 행정' 심각
국가 R&D혁신 큰 걸림돌


[ 오형주 기자 ] “대기업 취업에 목매는 청년실업자가 수십만 명인데 중앙은행의 발권력까지 동원해서 부실 대기업을 살리겠다고 합니다. 혹여 기업가 정신과 도전 정신을 위축시키는 것은 아닌지 걱정됩니다.”

박희재 산업통상자원부 연구개발(R&D)전략기획단장(55·사진)은 6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선·해운 등 부실기업 구조조정 논의에 대해 작심한 듯 이같이 격정을 토로했다. 그는 2013년부터 ‘국가최고기술책임자(CTO)’로 불리는 산업부 R&D전략기획단장(차관급 비상근직)을 맡아 3년간 무보수로 일했다.

산업부는 지난달 임기가 만료된 박 단장 후임을 상근직으로 뽑기로 방침을 정하고 공모 절차를 밟고 있다.

▶본지 5월6일자 A10면 참조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인 박 단장은 1998년 서울대 실험실 벤처1호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업체 에스엔유(SNU)프리시젼을 창업한 대표적 교수 사업가다. 외환위기 당시 “의병을 일으키는 마음으로 단 1달러라도 벌기 위해 창업에 나섰다”고 한 그의 말은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2005년 코스닥시장에 상장된 에스엔유프리시젼의 매출은 2013년 1000억원을 넘어섰다. 이 회사의 수출액 비중은 80%에 달한다.

박 단장은 “시장 논리로 움직이는 기업가들에게 ‘공짜점심’은 없다”며 “중소기업에서는 부채비율이 80~90%만 넘어가도 은행 대출 회수 얘기가 나오는데 부채비율이 7000%가 넘는 대기업에 나랏돈을 쏟아붓겠다고 하니 답답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2013년 에스엔유프리시젼이 중국 디스플레이업체인 BOE에서 600억원어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장비를 처음 수주했지만 국내 금융권에서 계약이행보증을 서주지 않아 한동안 고생했던 일도 털어놨다. “청년실업, 규제완화, 금융개혁 등 손댈 게 한둘이 아닌데 온 나라가 대기업 하나 살리는 일에 몰두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차라리 그 돈을 신산업 육성과 청년실업 해결에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외부 전문가로 정부에서 3년간 일한 박 단장은 공직사회 특유의 ‘칸막이 행정’을 국가 R&D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로 봤다. 그는 “처음 산업부에 와서 보니 국·과별로 R&D 예산이 촘촘히 짜여 있어 손댈 곳이 마땅치 않았다”며 “혹시라도 다른 과로 예산을 넘기면 과장이 무능한 걸로 보일까 두려워 다들 예산을 움켜쥐고 있어 당황스러웠다”고 설명했다.

박 단장은 대기업 위주로 정책을 입안하는 공무원들에 대한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는 “대부분의 대기업은 신산업에 뛰어들겠다는 도전 정신을 잃어버린 지 오래”라며 “대기업이 신산업에 나설 때까지 기다렸다 지원하면 된다는 (공무원들의) 막연한 생각은 큰 착각”이라고 지적했다.

2013년 단장 취임 직후부터 공과대학 혁신을 끊임없이 강조해 온 박 단장은 “나도 교수 출신이지만 연구실에 틀어박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에만 집착하는 연구 관행은 문제가 많다”며 “중소기업 R&D 혁신에 쓰일 돈이 다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로 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수십만 청년이 취업을 못해 거리를 헤매는데 서울대가 세계 대학 평가에서 10위 안에 든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박 단장은 재임 중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대형 R&D 사업인 ‘13대 산업엔진 프로젝트’를 입안한 것을 가장 보람된 일로 꼽았다.

그는 “기술을 둘러싼 시장·금융·규제개혁 등 생태계 전반에 초점을 맞추고 글로벌 강소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방향성을 제시해 의미 있었다”고 했다.

아쉬운 점으로는 이 같은 신산업 투자가 절차상 문제로 지연된 것을 들었다. 박 단장은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 통과에만 2년 정도 걸리다 보니 예산 반영 등을 거치면 입안한 지 4년 만에 실제 투자가 시작되는 경우가 있다”며 “신산업 투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 최대주주이자 대표, 서울대 교수, 차관급 공무원이라는 세 개 직책을 지난 3년간 동시에 수행한 박 단장은 “교수로서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는 한편 기업에서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내는 ‘창직(創職)’에 매진할 예정”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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