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무엇 때문에 우리의 운명을 유럽 어느 지역 운명과 얽히게 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이 그들의 야심, 경쟁, 이해관계, 변덕에 말려들게 할 것입니까.” 미국의 고립주의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1796년 고별연설에서 시작됐다. 유럽 중심의 ‘땅따먹기’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우리의 힘을 키우자는 게 근본 취지다. 이는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먼로 독트린’으로 더욱 구체화돼 외교 원칙으로 자리잡았고 약 120년간 지켜졌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미국 선박들을 침몰시키자 미국은 연합군에 가담했고,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정책 노선을 바꿨다. 전후 냉전 체제에서 곳곳에 군사를 파견하며 이른바 개입주의·국제주의로 들어섰다.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세계 경찰’로 지구촌 분쟁에 개입하다 보니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겼다. 이로 인한 피로감도 쌓였다. 2008년 금융위기에 된통 당한 뒤로는 더 그랬다.
마침 셰일 혁명 덕분에 중동에 대한 관심도 줄었다. 미국이 발을 빼자 중동 화약고가 터졌다. 그러나 이젠 남의 일이 됐다. 크림 반도가 러시아에 넘 載〉?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재정적자는 자꾸 늘었다. 세계를 향해 펼쳤던 전선이 자국의 민생 문제로 좁혀지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등장한 게 트럼프 현상이다. 더 이상의 대외 개입을 줄이고 국내로 눈을 돌리자는 트럼프의 ‘신(新)고립주의’에 미국인 10명 중 6명이 찬성하고 나섰다. 군사·안보 영역보다 경제 분야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 같은 대외 경제 개입과 외국 노동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빼앗기고 임금도 낮아졌다는 이유다. 값싼 중국산이 미국 제조업을 무너뜨렸다며 중국 제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겠다는 발언에 백인 하층민들은 열광한다. ‘안보 무임승차론’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무용론’도 결국 돈 문제다.
트럼프가 “고립주의가 아니라 미국 최우선주의”라고 강변해도 이런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그가 미국의 기층 여론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무역이나 안보 등의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다만 한 가지. 트럼프나 그의 추종자들이 ‘정통 고립주의자들도 경제 분야에서는 보호주의보다 자유무역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길 바란다. 조지 워싱턴도 고별 연설에서 “모든 나라들과 화평하고 자유로이 교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온건한 방법으로 상업의 흐름을 넓히고 다변화해야 한다”고 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한경닷컴 바로가기] [스내커] [한경+ 구독신청] ⓒ '성공을 부르는 습관' 한경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