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이제 그만 아이들을 놀게 놔두자"…오늘은 어린이날

입력 2016-05-05 08:30
수정 2016-05-06 15:35
황옥경 한국아동권리학회장
"놀이는 아이들에게 밥이나 호흡 같은 것"
어른 개입해 성공·실패 가르면 '가짜 놀이'



[ 김봉구 기자 ] “오월은 푸르구나/우리들은 자란다/오늘은 어린이날/우리들 세상”이라는 노랫말처럼 아이들은 교실과 학원, 스마트폰을 벗어난 세상에서 쑥쑥 자란다. 뛰놀고 부딪치면서 받아들이고 익힌다. 진짜 어린이날 선물은 아이들에게 놀이를 돌려주는 것 아닐까.

‘놀 권리’. 한국사회에서 잊히다시피 했다가 최근 들어 주목받기 시작한 개념이다. 아동의 놀 권리 찾기에 앞장서온 황옥경 한국아동권리학회장(서울신학대 교수·사진)은 어린이날을 맞아 “놀이는 아이들이 매끼니 먹어야 할 밥, 매순간 쉬어야 할 호흡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인생은 연습이 없어요. 공부만으로는 안 돼요. 공부란 구조화된 환경에서의 지식을 가르쳐주는 거죠. 현실에서 제대로 욕구와 능력을 실험해볼 기회를 주지는 않아요. 반면 놀이는 매순간 실전이에요. 놀면서 여러 시도를 해보고 이건 된다, 저건 안 된다 몸으로 배우는 겁니다.”

놀이에는 정해진 방식이나 목적이 없다. 그래서 한계가 없다. 구름을 만들어보려는 아이가 있다. 그림을 그릴 수도, 찰흙으로 형상을 만들 수도, 몸짓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백 명의 아이에게서 백 가지의 방법이 나온다. 아이들 놀이를 막으면 이런 다양성이 사라진다.

황 회장은 어른들부터 대범해지자고 주문했다. “부모도 애들이 공부만 하면서 자라는 걸 걱정해요. 아이가 뒤쳐질 걱정에 놀게 놔두지 못할 뿐이죠.”

그가 생각하는 교육의 본질은 다양한 배움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이 높다는 통설에 동의하지 않는 건 그래서다. 교육열이라기보다는 학습열, 혹은 자녀를 명문 학교에 보내려는 경쟁의식이 강하다고 평했다.

사실 황 회장 자신도 학원 다니기 싫어하는 아들을 둔 엄마였다. 불안했지만 아이의 뜻을 받아들였다. 아들은 학교 마친 뒤 인적 끊긴 놀이터에서 혼자 놀곤 했다.

하지만 이런 조건이 오히려 아이를 잘 놀게 만들었다. 그는 “아이가 학원에 다녀오는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놀게 됐다. 그러면서 어울리는 친구 몇몇으로 한정되지 않고 교우관계가 굉장히 넓어졌다”고 귀띔했다.

공부하러 떠난 영국에서의 경험이 확신을 더했다. 영국의 학교는 한 주에 두 차례,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는 스포츠데이로 지정했다. 남녀 구분 없이 옆 학교와 체육경기를 갖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적 경험을 톡톡히 쌓는다고 했다.

“놀이가 아이들이 자신을 확인하는 절차더라구요. 내가 뭘 잘하고 못하는지, 어떤 걸 하면 재미있는지, 내 안의 신체적·정신적 욕구를 실험하고 스스?삶을 조직하는 과정입니다. 1년에 한 번 운동회 하는 우리와 한 주에 두 번씩 스포츠데이를 갖는 영국, 어느 쪽이 그런 기회가 많을까요?”

‘진짜 놀이’의 중요성도 반복해 강조했다. 핵심은 무(無)목적성이다. 하고 싶지 않은 놀이, 즉 놀이란 이름의 또 다른 학습이 돼선 안 된다는 뜻이다. 성인이 개입해 성공과 실패를 정하는 방식의 놀이는 ‘가짜 놀이’라고 황 회장은 지적했다.

“놀이가 중요하다는 어른들 인식 변화는 반가운 일이에요. 하지만 어른이 놀이 주제와 방식을 정해두는 건 곤란해요. 예를 들어 ‘하늘에 구름 3개를 만들어’라고 목표를 정하고 ‘2개 만들면 실패’ 식이 돼선 안 된다는 거죠. 놀이도 성공과 실패가 나뉠 수 있습니다. 다만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어린이가 돼야죠. 스스로 하는 실패여야 경험으로 남아요.”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어느 한 프로그램도 똑같이 진행하지 않는 것. 어쩌면 당연하게 갈등상황을 빚고 그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 창의성을 키우는 ‘진짜 놀이’의 본질이다.

보건복지부는 우리나라가 1991년 UN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한 지 25년 만인 올해 어린이날을 앞두고 비로소 ‘아동권리헌장’을 제정·선포했다. 아동의 놀 권리 역시 권리헌장 9개 조항에 포함됐다. 정부 정책으로 확정해 어린이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미래에 투자한다는 의의가 있다.

황 회장은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반짝 관심을 가졌다?사라지는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국가가 힘써 아이들이 놀이와 여가를 충분히 누리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줘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혹시 지금 아이들이 편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런 생각은 버렸으면 합니다. 먹고 입고 사는 건 풍족해졌죠.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과거 세대가 겪지 않았던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어요. 항상 긴장 속에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제 놀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돼야 합니다.”

김봉구 한경닷컴 기자 kbk9@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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