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바이러스와 싸운 미생물 학자 이호왕

입력 2016-05-01 18:46
수정 2016-11-22 17:02
국민이 뽑은 과학자 (2) '바이러스박사' 이호왕

2차 대전과 6.25전쟁 중 수천명의 희생자 냈던 공포의 유행성출혈열
각국서 원인조차 모를 때 한탄강 등줄쥐서 병원체 발견
"끈기와 아이디어의 결과물"


[ 박근태 기자 ]
국내 바이러스 1호 박사인 이호왕 고려대 명예교수(한탄생명과학재단 이사장·88)가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을 일으키는 ‘한탄바이러스’를 발견한 지 올해로 40년을 맞았다. 이 바이러스는 191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첫 환자가 보고된 뒤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을 거치며 수천 명의 희생자를 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은 대대적인 인체실험까지 벌였고 미국은 노벨상 수상자 2명이 포함된 연구진 200여명과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정체를 밝히려고 애썼지만 좀처럼 감염 경로와 원인 병원체를 찾지 못했다.

지난달 28일 서울 서초구 대한민국 학술원에서 만난 이 교수는 “한탄바이러스의 발견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일”이라며 “끈기와 아이디어, 여러 사람의 도움이 잘 맞아떨어진 결嚮눼?rdquo;고 회고했다. 그는 과학기술진흥 50년을 맞아 지난달 8~14일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 한국경제신문이 공동으로 인터넷 설문조사해 뽑은 ‘우리 생활을 변화시킨 근현대 대표과학기술인’ 10명 중 유일한 생존 과학자다.

바이러스, 진단법, 백신 모두 개발

1959년 미국 미네소타대에서 미생물학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 교수의 첫 연구 분야는 일본뇌염이었다. 국내에서 연구비를 조달하기 어려웠던 그는 미 국립보건원(NIH)에서 8만달러와 자동차 한 대를 지원받아 일본뇌염 연구에 들어갔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일본뇌염 백신이 개발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를 찾아야 했다.

때마침 1969년 휴전선에서 근무하던 군인과 인근 주민 사이에 정체 모를 괴질이 퍼지면서 그는 이 분야를 파보기로 했다. 평생 업이 될지 이때는 몰랐다. “5년간의 연구에도 좀처럼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미 육군을 설득해가며 겨우 연구하던 중 쥐를 잡던 채집원 한 명이 이 괴질에 감염되면서 등줄쥐가 유력한 매개체로 지목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바이러스가 있는 곳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든 장기 조직을 일일이 떼어내 조사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전자현미경이 없던 시절이라 항체가 있는 혈청에 형광물질을 묻혀 바이러스를 찾는 형광항체법이란 검사법을 도입했다. 1975년 12월 마침내 등줄쥐 폐 조직에서 혈청과 반응해 밝게 빛나는 바이러스가 처음 눈에 들어왔다. 이 교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마치 은하수 별빛 같았다”고 했다. 이듬해인 1976년 학계에 한탄바이러스 발견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1981년에는 서울 마포구 한 건물 지하상가에서 잡은 집쥐에서 한탄바이러스 친척뻘 되는 서울바이러스도 찾아냈다. 해외에서 유전학적으로 비슷한 푸우말라바이러스, 프로스펙트힐바이러스가 잇달아 분리됐다.

세균전 수행, 간첩 오인 받기도

그의 연구는 일화도 많다. 쥐를 채집하려던 연구원이 군사지역에 들어갔다가 간첩으로 오인되기도 했고 미군의 세균전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 교수는 “6·25전쟁 당시 미군과 국군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피해가 발생하면서 서로 상대가 세균전을 벌였다고 의심했다”며 “세균전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결국 해프닝으로 결론났다”고 말했다.

사스와 에볼라, 메르스 바이러스는 아직 예방 백신이나 치료약이 없다. 하지만 한탄바이러스는 예방 백신이 있다. 이 교수는 “바이러스를 분리하고 조직을 배양하던 연구원 8명이 잇달아 유행성출혈열에 걸리면서 안전한 연구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고 했다. 1991년 녹십자와의 공동 연구로 개발한 유행성출혈열 예방 백신 ‘한타 박스’가 그렇게 나왔다. 바이러스 발견자가 진단법과 예방 백신까지 개발한 최초 사례다. 지금도 휴전선 일대에 근무하는 군인과 주민은 이 주사를 맞는다.

바이러스 연구 창의적 아이디어 필요

이 교수는 지난해 말 대한바이러뵉瑾맙?논문 하나를 또 발표했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30여종에 이르는 한타바이러스를 정리한 일종의 족보다. 국제 학계는 한탄·서울바이러스와 비슷한 바이러스의 상호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이들 바이러스의 속(屬) 이름을 한타바이러스로 지었다.

이 교수는 한탄바이러스와 비슷한 바이러스가 지금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1994년 미국의 아메리카 인디언인 나바호족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이 발생했다. 한타바이러스폐증후군으로 불리는 이 병은 폐렴을 일으키고 1주일 안에 숨지게 할 만큼 치명적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선 쥐가 아니라 박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는 “바이러스 연구는 지금처럼 남의 연구를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다”며 “NIH와 같은 세계적 연구기관에서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수준급 실력과 아무도 생각 못하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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