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15)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3·1만세 운동에는 3개월 동안 200만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합니다. 시위 횟수는 1500여회에 이르고 5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체포당했습니다. 그 기간에 사망한 사람이 8000명에 이르니 일본의 탄압이 얼마나 무자비했는가를 알 수 있지요. 만세 운동을 하다가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독립 열사 가운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유관순입니다. 유관순은 3·1운동 당시 이화학당 고등부 학생이었습니다. 그때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학생들이 다치거나 잡혀가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유관순은 학교 담을 넘어 나가서 시위에 참가했습니다.
시위 격렬…조선총독부 휴교령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휴교령을 내렸지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고향 아우내(병천)에 내려간 유관순은 그곳 주민들에게 함께 만세 운동하기를 독려했습니다.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유관순은 시위대의 가장 앞에 나섰습니다. 유관순은 단상에 올라 “지금 세계의 피압박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합시다”라고 군중에게 외쳤습니다.
이날 시위에 일본군은 총칼로 맞섰습니다. 유관순의 부모도 이날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지요. 주동자로 잡혀간 유관순은 재판에서 5년형을 받았습니다. 유관순은 재판장에서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마다 혹독하고 잔인한 고문을 당했지요.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던 유관순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3·1만세 운동을, 단지 만세를 부르다 여러 사람이 죽거나 다치고 잡혀간 것으로 끝난 사건으로만 여겨서는 안 됩니다. 3·1운동 결과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임시정부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1일 상하이에서 수립됐습니다. 당시 상하이에는 서양 여러 나라의 외국인 거주 지역인 조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좋은 곳이었지요.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는 이승만이, 국무총리에는 이동휘가 선출됐습니다.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으로 정했습니다.
다수결로 나라 이름 ‘대한’ 선택
대한제국 때 나라가 망했는데 다시 ‘대한’이라는 이름을 쓸 필요가 있겠느냐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라는 의견이 나오자 다시 의논하게 됐고 다수결로 ‘대한’이 선택되었습니다. 대한제국 때 쓰던 국기인 태극기도 계승하여 사용하게 되었지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와 대통령제를 선택하였습니다. 공화제는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나라를 다스리게 하는 제도입니다.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에서 나라를 잃었으니 나라를 되찾으면 다시 황제의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화제 정부를 선택함으로써 왕조 시대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임시정부 수립은 우리 역사상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 의미 깊은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에 3·1운동이 있었던 것이지요.
3·1운동으로 바뀐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태도입니다.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군인과 경찰을 앞세워 우리 민족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이를 무단 정치라고 합니다. 일본은 자신들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1912년 신태형령을 발표했습니다. ‘태형’은 죄인에게 매질하는 형벌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곤장 등 태형이 있었지만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지요. 그런데 이를 일본이 되살려 우리 민족에게만 적용했습니다. 일본인들 사이에는 “조선인은 때리고 겁주면 말을 잘 듣는다”는 식의 생각이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순사들은 재판도 하지 않고 우리 민족을 잡아가두고 매질했습니다.
일본, 겉으론 문화통치 전환
그런데 3·1운동을 계기로 무단 통치를 문화 통치로 바꾸겠다고 조선총독부가 발표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라는 것을 3·1운동으로 보여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우리 민족을 살살 달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꾼 것입니다. 그 결과 단체 활동이나 언론 활동이 허가되었습니다. 또 민족 교육을 방해하던 규제를 풀어서 초등 교육을 확대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가 정말 문화적으로 바뀐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게 한 것입니다. 해방될 때까지 군인이 아닌 문관이 총독으로 임명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는 무단 정치가 계속되었음을 말해주는 근거입니다. 또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지만 한편으로는 전문적인 ‘고등 경찰제’를 도입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들이게 하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이 우리 민족의 정기와 독립 의지를 우리 민족 스스로와 세계 여러 나라에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라는 데는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3·1운동의 정신을 높이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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