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이 되는 게 재앙이 되는 현실
명시적 규제만 35개, 성장 의지 꺾어
지정기준이라도 대폭 상향조정해야"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지난 3일 공정거래위원회는 하림그룹, 셀트리온, 카카오의 자산총액이 각각 5조원을 넘어섰다며 대기업집단으로 지정했다. 하림은 1986년 설립한 지 30년 만에 자산총액 9조9000억원에 이르는 기업집단이 됐다. 2002년 바이오·제약 벤처로 시작한 셀트리온은 14년 만에 자산총액 5조9000억원에 이르는 기업집단으로, 인터넷 기업 카카오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을 기준으로 근 20년 만에 자산총액 5조1000억원의 기업집단으로 도약했다.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회사들이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했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0년간 한국 경제는 주력산업, 수출주종상품, 대표기업에 큰 변화 없이 정체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대기업집단에 새로 편입하는 회사는 있었지만 기존 대기업에서 계열 분리한 회사, 아니면 공기업이 대부분이었다. 구글의 인공지능 ‘알파고’ 사례에서 보듯이 세계는 제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각축 중이지만 한국은 그에 견줄 만한 기업이 보이지 않았다. 국내 민간 회사 중 지난 30년 이내에 창업해서 대기업집단에 지정된 경우는 미래에셋이 유일할 정도로 기업의 성장 사례를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최근의 한국 경제는 평균 성장률이 3%에 못 미칠 정도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저성장 고리를 끊고 지속 발전하려면 사회 전반에 꿈과 도전, 혁신의 기업가 정신이 넘치고 하림, 셀트리온, 카카오 같은 사례가 앞으로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하기에는 제도, 인센티브가 거꾸로 돼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 대기업집단이 되면 상호출자 금지, 신규 순환출자 금지, 채무보증 금지, 계열거래 제한 등 무거운 규제를 부담해야 한다. 계열사 거래, 친인척 주식소유·변동 현황까지 보고하는 행정규제는 별도 부담이다. 모두 합하면 공정거래법을 포함해 20개 법률에서 명시적 규제만 35개에 이른다고 하니 대기업집단 지정이 축복은커녕 재앙이 되고 있다는 업계의 하소연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과 그에 따른 규제는 기업의 성장기회와 의지를 제약하는 등 문제점이 심각하다. 더 늦기 전에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 원칙적으로 지정 제도와 규제를 아예 폐지하는 게 합리적이다. 이 제도를 1987년에 시작했을 때만 해도 기업집단을 한국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로 보았다. 그래서 우리 식의 규제가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기업집단은 시대에 뒤떨어진 조직형태가 아니며, 미국을 빼면 주요 20개국(G20)에서도 널리 존재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럼에도 대기업집단을 지정해 무거운 규제를 가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외국기업과 세계를 무대로 개방경쟁을 하는 시대에 스스로 우리 기업에 불리한 족쇄를 채우는 것은 말 그대로 자승자박(自繩自縛)이다.
경제력 집중을 막겠다는 사전 규제는 없애고 경제력 남용을 효과적으로 적발·제재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지정 기준이라도 대폭 상향조정해야 한다. 상위 4대 그룹의 평균 자산액이 206조원인데 5조원대 기업집단을 그들과 똑같이 획일적으로 규제하면 누가 봐도 불공평하고, 누구를 위한 그리고 무엇을 위한 규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참고로 2016년도 민간 기업집단 52개 중에 자산 10조원 미만 그룹이 24개인데, 이들의 자산을 다 합쳐도 4대 그룹 평균 수준에 못 미친다. 최소한 자산 10조원까지는 경제력집중 억제 목적의 규제에 실익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의 대안으로 지정 기준을 10대 그룹 또는 국내총생산(GDP)의 1%(자산 규모)로 고정시키는 방안은 어떨까. 이 경우 규제가 적용되는 민간그룹은 20개 미만이다.
황인학 <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inhak@keri.o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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