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공부] 일본, 국토 40%를 일본인에게 팔아넘겨 문화재 강탈· 훼손…'3·1운동' 폭력 진압

입력 2016-04-08 17:32

‘식민’이라는 낱말은 ‘심을 식(植)’자와 ‘백성 민(民)’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백성을 심는다’라는 뜻입니다. 대체 어디에다, 어떤 백성을 어떻게 심는다는 말일까요? 물론 심을 곳은 지배를 당하는 식민지입니다. 그런데 심을 백성은 지배하는 나라 사람들이지요.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우리 땅에 자기네 나라 사람들을 데려다 살게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살던 땅을 빼앗아야 했지요. 일본은 자국민의 ‘식민’을 위해 무엇보다 먼저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소유권 개념 없던 땅 주인들


일본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정해진 날짜 안에 관청에 신고하라고 했습니다. 얼핏 보면 토지 조사 사업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일본은 토지 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히 해두는 ‘조사’이며, 신고하면 원래 주인에게 그 땅의 소유권을 인정해주겠다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시 현실로는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에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토지 조사 사업을 한다는 것부터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 당시에는 토지 소유권이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문중의 땅 등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에게는 소유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을 수도 있지요.

교육을 받지 못한 농민들은 복잡한 신고 절차도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조상 대대로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 무슨 신고가 필요하냐, 설마 땅을 퍼가기야 하겠느냐 등의 생각으로 신고를 안 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일본은 신고를 돕기 위한 계몽이나 홍보, 교육 같은 것은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땅을 빼앗기 위한 조사였으니까요.

몇 차례에 걸친 토지 조사 사업이 다 끝났을 때 조선총독부로 넘어간 땅은 전국 토지의 40%에 이르렀습니다. 이 땅은 총독부가 직접 소유하거나 동양척식회사라는, 일본 정부가 세운 회사 혹은 개인에게 싼값에 팔렸습니다. 우리 땅의 주인이 일본 사람들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농민들은 일본인 지주 밑에서 엄청난 세금을 내야 하거나 아예 그 땅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쫓겨난 농민들은 조국을 등지고 중국으로, 러시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지요.

경희궁 정문을 사당으로 사용

이 무렵 일본은 또 수없이 많은 우리 문화재를 훼손하고 빼앗아갔습니다. 경복궁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를 짓는가 하면 동궁이었던 자선당은 아예 건물을 통째로 일본으로 옮겨갔습니다. 대한제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환구단을 없애고 그 자리에 호텔을 지었습니다. 경희궁의 정문은 떼어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사당 정문으로 썼고 정전인 숭정전 건물은 불교 사원으로 팔기도 했습니? 큰 건물도 이렇게 약탈을 했으니 옮기기 쉬운 그림이나 골동품 등의 경우 빼앗긴 문화재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지요.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고 약탈에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서로 식민지를 더 많이 가지려고 경쟁하다가 일어난 전쟁입니다. 이미 많은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등과 식민지 쟁탈에 새롭게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세력이 맞서 싸운 것입니다.

미국은 뒤늦게 참전해 영국 등이 이기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덕분에 발언권이 강해진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은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 자결주의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민족 자결주의는, 한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가 알아서 결정하게 하자는 주장이지요. 이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식민 지배를 받던 많은 나라 사람들이 독립에 큰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한 것은 1919년 초였습니다. 그해 1월21일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강하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나라 안에는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이완용이 사람을 시켜 고종이 마실 식혜에 독을 탔다는 소문이지요. 그 소문을 들은 국민들은 이제껏 일본을 향해 쌓였던 울분을 한꺼번에 터뜨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민족 자결주의가 배경이 되고 고종의 독살설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 3·1운동입니다.

1919년 3월1일 민족 지도자 33명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습니다. 독립 선언서는 우리나라가 자주 독립국이고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세계 모든 나라에 알리는 내용으로 이뤄졌지요. 같은 날 정오 탑골공원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독립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 만세 운동은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군중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의 물결이 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일본은 비폭력 평화 시위인 3·1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습니다. 총칼을 동원해 시위 군중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시위를 잠재우려 했습니다. 수원 제암리나 화성 송산면에서는 사람들을 교회에 가두고 불을 지르거나 마을 전체를 불태우며 주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습니다. 일본의 이런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만세 운동의 불길은 석 달이 넘도록 꺼지지 않았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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