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12)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황태자였던 순종을 황제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완전히 자신들의 독차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언제 다시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일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있었던 1907년부터 대한제국을 어떻게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처럼 무찔러버릴 것인가, 보호국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합병할 것인가? 일본의 야욕 앞에 대한제국은 바람 앞에 선 등불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
을사늑약이 맺어진 이후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우리 국민은 일본의 만행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나 일본인에 대해 응징하기 ?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단한 일은 이토 히로부미 총살 사건입니다. 서른 살의 청년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을사늑약의 원흉이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를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1909년 7월 이토는 대한제국과 만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상의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났습니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은 역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일본인으로 변장했기 때문에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이토와 코코프체프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쏘았습니다. 그중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습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대한 만세’를 외치고 체포되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가 15가지 죄를 지은 죄인이니 총살당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중근은 이토의 죄명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 등을 들었지요. 그런 죄인을 총살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정당한 일이라고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안중근은 이토를 총살한 다음 해인 1910년 3월26일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사형되었습니다.이토가 살해당하자 일본에서는 대한제국 문제를 빨리 마무리지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일본은 데라우치라는 사람을 통감으로 보냈습니다. 그는 육군대신 출신이었습니다. 통감으로 부임한 데라우치는 서울 시내 곳곳에 무장한 군인과 경찰 등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합병조약 1조 “일체 통치권을 넘긴다”
일본은 1910년 8월22일 이완용을 앞세워 기어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는 조약을 맺게 하였습니다. 그날 창덕궁 대조전의 흥복헌에서 ‘한일합병조약’을 최종 승인하고 이를 실행토록 내각에 위임하는 어전회의가 열렸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어전회의였지요. 이 회의에는 이완용 총리대신 등 국무대신 외에 황족 대표, 원로 대신들이 참석했습니다. 한일합병조약의 주요 내용은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마 합병조약 서류에 자기 손으로 옥새를 찍을 수 없었던 순종은 이완용을 전권위원으로 임명하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일본 통감 데라우치와 상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날 어전회의를 병풍 뒤에 숨어서 지켜본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는 이완용에게 옥새를 내주지 않으려고 치마폭에 감췄답니다. 하지만 결국 황후는 삼촌인 윤덕영에게 옥새를 빼앗기고 말았지요. 옥새를 받아들고 흥복헌을 나온 이완용은 조선 통감 관저로 달려가 데라우치와 함께 한일합병조약에 서명 날인하였습니다.
서명은 8월22일 했지만 발표는 바로 할 수 없었습니다. 국민의 반발이 있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병합에 반대하는 대신을 가두고 순종에게 한일합병조약을 선포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 선포식은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렸습니다. 우리가 지금 나라가 치욕을 겪은 날, 국치일(國恥日)로 기억하는 8월29일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식 행사인 한일합병조약 선포식이 열린 날입니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일본의 내정 간섭을 허락한 대한제국은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내주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황제 순종
이후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지위가 떨어졌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순종을, 자신들의 ‘천황’을 모시는 신하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순종을 ‘창덕궁 이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라 이름도 대한제국을 버리고 다시 ‘조선’으로 부르게 했습니다. 요즘도 가끔 들을 수 있는 ‘이조(李朝)’라는 말은 ‘이씨 조선’의 줄인 말입니다. 이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역사를 말살하고 우리의 왕조를 격하하기 위해 이 무렵 만든 말입니다. 순종은 1926까지 창덕궁에 머물다가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렸던 그곳 흥복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은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유릉에 묻혔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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