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덕후' 전성시대

입력 2016-03-15 17:33
수정 2016-03-16 09:43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이세돌 9단이야말로 덕후 중의 덕후다. 머릿속에는 바둑뿐이다. 이긴 날도 맘에 안 드는 수가 있으면 밤새워 복기한다. 그런 이세돌이니 최강의 바둑 인공지능(AI) 알파고와 명승부를 펼쳤지 싶다. 알파고를 만든 데미스 허사비스 역시 체스 신동이자 게임 덕후였다. 덕후 대 덕후의 대결이었던 셈이다.

덕후는 일본어 ‘오타쿠(オタク)’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준말이다. 특정 분야나 대상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초기에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같은 부정적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전문가를 능가할 정도의 마니아를 지칭한다.

초등생부터 장관까지 '덕후 인증'

주위에 덕후들이 넘쳐난다. 영화·드라마의 팬을 넘어 ‘셜로키안’(셜록 홈스 마니아) ‘톨키안’(톨킨 마니아) ‘매트릭스빠’들이 생겨났다. 미드 ‘빅뱅이론’과 8년째 동거 중이란 광팬도 있다. 포크가수 박인희가 일흔이 넘어 컴백한 동기도 그의 앨범이 닳아서 못 들을까 봐 똑같은 앨범을 서너 장씩 소장한 팬 덕이란다.

해외 프로축구·야구 기사들에 달린 댓글을 보면 기사 오류를 잡아내는 전문가급 덕후들이 즐비하다. 기자 해먹기도 참 힘들다. 미국 메이저리그 캔자스시티 로열스에 대해 이성우 씨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TV에 소개된 초등 4학년의 자동차 ‘덕력(덕후 능력)’은 초능력에 가깝다. 1400여종의 미니카 차종을 모두 구분하고 뺑소니 영상 속의 전조등, 타이어 휠만 보고도 차종을 특정해 경찰에 도움을 줄 정도다.

덕후에 의한 덕후를 위한 플랫폼도 생겨났다. 취업준비생들이 술자리서 떠오른 아이디어로 시작한 팟캐스트 ‘철수와 존슨의 취업학개론’은 벌써 5년째다. 삐딱한 20대들이 잡지의 고정관념을 파괴한 한 장짜리 웹진 ‘바로그찌라시’는 20대의 포털인 ‘20’s Timeline’으로 발전했다.

장·차관 중에 퇴임 후 덕후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이들도 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바이칼호와 네이멍구까지 다녀온 고대사학자로, 배국환 전 기획재정부 2차관은 문화유산 전도사로 변신했다. 전관예우나 기웃거리는 세태에 박수받을 만하다.

덕후 많을수록 고도화된 사회

덕후가 늘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고도화됐다는 신호다. 제너럴리스트보다는 스페셜리스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업들도 덕후에 주목한다. CJ그룹은 신입공채 자기소개서에 마니아로 불릴 만큼 몰입해본 분야를 3개까지 적도록 했다. 무엇이든 흠뻑 빠져본 인재를 찾는 것이다.

성공한 기업가들은 대개 어려서 그 분야의 덕후였다. 김홍국 하림 회장은 초등 4학년 때 외할머니가 선물로 준 병아리 10마리를 키운 것이 ‘닭고기 왕국’의 출발이었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는 기숙사 룸메이트(이해진 NHN 의장)가 밤새워 공부할 때 옆에서 밤새 게임을 한 일화로 유명하다. 중국의 ‘드론 황제’인 프랭크 왕 DJI 창업자는 어려서부터 모형비행기 덕후로 날아다니는 로봇을 꿈꿨다.

21세기는 이런 덕후들의 시대다. ‘성덕(성공한 덕후)’들은 무엇에 빠지든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 우물을 깊게 파면서 쌓은 전문지식은 취미 이상이 될 수 있다. 덕후와 직업을 일치시키는 ‘덕업일체’라면 금상첨화다. 재능이 뛰어난 자는 노력하는 자를 못 당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해낼 수 없다. ‘정치 덕후’만 빼고 덕후들은 많을수록 좋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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