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D-30 대담] 김형오 한경 객원대기자 "한국 정당은 공룡, 충성도 강한 사람 살아남아…정당기능 확 줄여야"

입력 2016-03-13 18:19
만난 사람=홍영식 정치부장

"내년 대선·내후년 지방선거…포퓰리즘 공약 걱정
과거 현역 '물갈이'했지만 구태정치 바뀌지 않아
정치인들 할 일 없으니 장관·기업인 불러 호통"


[ 유승호 기자 ]
“안타깝다, 답답하다, 걱정스럽다.”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마뜩잖기는 5선 의원을 지낸 전직 국회의장도 보통 국민과 마찬가지였다. 김형오 한국경제신문 객원대기자(18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는 13일 서울 효창동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실에서 홍영식 한경 정치부장과 한 대담에서 후배 정치인과 낡은 정치 문화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4·13 총선 얘기를 꺼내자 “아찔하다”고 했다. “올해 총선을 시작으로 내년 대통령선거, 후년 지방선거까지 3년 연속 선거가 벌어지는데 오로지 당선을 목적으로 한 선심성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공약이 얼마나 많이 나오겠느냐”는 것이었다.

김 대기자는 최근 한국경제신문을 비롯해 언론에 기고한 정치 관련 칼럼을 모은 책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를 냈다. 그는 “현실을 차갑게 진단하고 따끔하게 침을 놓아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에게도 경각심을 갖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12년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현역 국회의원일 때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에 차이가 있습니까.

“현역 의원일 때도 소속 정당의 이해관계보다는 전체 국민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일했어요. 그런데도 나와서 보니까 그때는 아집과 집착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속한 정당 중심으로 바라봤던 것이죠.”

▷책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한국 사회가 진영 논리에 너무 빠져 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소리도 크고요. 난마같이 얽힌 현실을 헤쳐나가려면 다양한 목소리를 포용하면서도 원칙을 지키고 자기를 희생하는 지도자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도자를 키우는 시스템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요. 고시 출신 또는 교수 출신 지도자가 많아요. 아니면 평생 길거리에서 투쟁만 하던 사람이 지도자가 되죠. 공동체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훈련은 제대로 안 돼 있어요. 사색과 독서, 사회성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정치인이 가져야 할 기본 요건은 용기와 설득력입니다. 지금 정치 지도자들은 그게 부족해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 리더십이라고 하죠. 찬 바다에 가장 먼저 들어가 먹이와 무리를 구하는 용기를 뜻합니다. 이 같은 용기와 희생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정치를 하수도에 비유했는데 어떤 의미입니까.

“정치와 종교는 다릅니다. 종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해야 하는 상수도라고 할 수 있죠. 반면 정치는 더러운 물이 흘러가는 하수도입니다. 하수도가 막히면 정치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들어가서 오물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은 입만 동동 떠 있어요. 말로만 합니다. 내 얼굴에 흙탕물이 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해야 하는 것이 정치입니다.”

▷총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3년 연속 선거가 있다는 생각만 하면 아찔해요. 딱 10년 전인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통령선거, 2008년 국회의원 총선까지 3년 연속 선거가 있었어요. 지금은 그때보다 경제도 훨씬 안 좋고 남북관계도 심각해요. 선거를 하면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죠. 온갖 공약이 다 나오는데 누가 국가 재정을 생각하면서 합니까. 복지는 왕창 베풀고 세금은 왕창 깎아준다고 하겠죠. 이걸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을 해야 되니….”

▷여당은 계파 간에 공천 싸움이 벌어지고 있고, 야당은 다시 통합 얘기가 나옵니다.

“국민을 보고 하는 정치가 아닙니다. 국회의원 뱃지를 달아야겠다는,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만 있고 국민은 하나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거예요. 국민이 무섭다고 느낀다면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

▷선거구 획정도 법정 시한을 넘겨 총선을 불과 42일 앞두고 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정치 신인들은 자기를 알릴 기회조차 갖지 못하게 됐어요. 국회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기득권 집단으로 뭉쳐서 진입장벽을 쌓은 거예요. 유권자가 후보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불과 20일입니다. 유권자가 후보자를 매일 따라다닐 수도 없는데 뭘 알고 투표를 하겠습니까. 묻지마 투표가 되지 않을까요. 많은 국민이 실망감에 투표를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1번 지지자는 1번 찍고, 2번 지지자는 2번 찍고, 중도 성향의 국민은 흥미를 잃는 선거가 될까 걱정입니다.”

▷총선 판도는 어떻게 예상합니까.

“한국 정치가 워낙 변화무쌍하니 예측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무모합니다. 다만 야당이 분당됐을 때 새누리당이 가만히 앉아서도 180석은 넘을 수 있겠다는 얘기가 나왔는데 너무 안이한 생각이죠.”

▷여야 모두 현역 의원 ‘물갈이’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산술적인 의미의 물갈이는 반대합니다. 과거엔 수치를 정해 놓고 현역 의원의 20%를 공천에서 탈락시킨다, 30%를 교체한다는 식으로 경쟁하듯이 했어요. 그렇게 매번 절반씩 바뀌었지만 정치가 크게 발전하지는 않았죠. 그렇다고 정치에 새로운 물결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문제죠. 더구나 19대 국회는 의원들 스스로도 최악의 국회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산술적 물갈이로 한계가 있다면 정치 문화나 구조가 문제일까요.

“한국 국회의원의 학력, 경력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장·차관, 대학 총장 출신이 앞다퉈 국회의원을 하려고 하는 나라가 우리 말고 또 있을까요. 그런데 우리 정치는 당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게 돼 있어요. 제 경험에 비춰보면 사리 분별을 잘하는 사람은 앞에 잘 나오지 않으려 하고, 오히려 (사리 분별이) 부족한 사람들이 앞에 나섭니다. 정당의 힘이 너무 세요. 당론으로 다 정해 버리고 국회의원은 따라가기만 하죠. 국회가 대화와 토론의 장이 아니라 당론 대결의 장이에요. 대한민국 정당은 공룡입니다. 책임도 안 져요. 정당의 기능을 확 줄이고 국고보조금도 없애야 합니다.”

▷정치 문화의 문제를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가 국회선진화법 아닙니까.

“18대 국회에서 법안 직권상정을 놓고 여야가 물리적으로 많이 충돌했죠. 국회에서 폭력을 몰아내기 위해 직권상정을 제한하되 의원 60%가 요구하는 법안은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내용으로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었죠. 이 법의 취지는 직권상정을 안 할 테니 끝까지 대화하고 토론하라는 거죠. 그런데 야당 입장에서 볼 때 의석 40%만 갖고 있으면 다 반대할 수 있고, 여당이 원하는 법안에 자기들이 원하는 법안을 ‘끼워팔기’ 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대화를 더 안 하는 거예요. 여당도 야당이 저러는데 뭐하러 타협하느냐면서 가만히 있고요. 법만 보기 좋게 만들면 뭐합니까. 정치 문화를 바꿔야 합니다.”

▷국회의 권한이 너무 강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국회의원이 장관이나 기업인을 불러서 호통치고, 정부가 요구하는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주지 않고, 인사청문회 열어서 장관 후보자 망신주기나 하고 이러니 국회를 보는 여론이 안 좋은 것이죠. 역설적으로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책임을 안 지고 말만 하면 풔歐楮? 국회의원들 스스로 자기 일을 찾아서 하고 책임성을 가져야 합니다.”

▷국회와 정부의 원활한 업무 협조를 위해 국회를 세종시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세종시 고위 공무원들이 1주일에 절반가량은 국회에 와 있습니다. 행정 효율성을 높이려면 국회를 세종시로 옮겨야 합니다. 국회 직원이 약 5000명인데 이들만 내려가도 세종시 상주 인구가 대폭 늘어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죠. 국회 전체를 옮기지 않고 세종시 분관을 두는 일은 절대 해선 안 됩니다. 분관을 두면 활용하지도 않고 시설비만 낭비할 겁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자기가 먼저 희생하면 오늘 죽더라도 내일 반드시 살아납니다. 훨씬 더 많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국민 중심의 정치이고 정치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진정한 용기입니다.”

김형오 한경 객원대기자는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외교안보연구원 연구관, 국무총리실 정무비서관, 노태우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일했다. 1992년 14대 총선 때 당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부산 영도에서 당선돼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같은 지역구에서 18대까지 내리 5선에 성공했고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대표를 거쳐 18대 국회 전반기 의장을 지냈다. 현역 국회의원 시절 특정 계파에 치우치지 않고 합리적으로 의정 활동을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18대 국회 임기를 끝내고 “국민에게 표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역대 정권의 도청 비화를 파헤친 《엿듣는 사람들》(1999년), 수필집 《돌담집 파도소리》(2003년)에 이어 정계에서 은퇴한 2012년 비잔틴제국의 쇠망사를 다룬 《술탄과 황제》를 내는 등 전업작가 못잖은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해 7월부터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부산대 석좌교수로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1947년 경남 고성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정치학 석사 △경남대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동아일보 기자 △14~18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사무총장, 원내대표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 △18대 국회 국회의장 △한국경제신문 객원대기자

정리=유승호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