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섭 중소기업청장은 2007년 자동차 부품업체 현대오토넷 사장으로 있었다. 당시 벤츠 등 독일 자동차 회사에 부품을 공급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테스트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벽이 높았다. 방법을 찾던 끝에 독일에 ‘기술전문기업’(ESP:Engineering Service Provider)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설계·소재·디자인 등 각 분야별 기술만 전문으로 제공하는 기술전문기업과 함께 팀을 만들고 독일 기업이 원하는 제품을 개발했다. 독일의 ‘자동차 부품 생태계’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현대오토넷은 결국 국내 기업중 처음으로 벤츠와 오디오, 전자제어장치(ECU) 등을 공급하는데 합의했다.
◆“기업간 경쟁에서 생태계 경쟁으로”
주 청장은 10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연구개발(R&D)만 전문으로 하는 기술전문기업을 활성화시켜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독일에는 완성차 업체 인근에 기술전문기업 수 천곳이 있다고 주 청장은 전했다. 부품 회사들은 기초 기술과 아이디어만 있으면 이들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 생태계에 진입할 수 있다. 한국에도 이런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향후 경쟁은 기업간 경쟁에서 생태계 경쟁으로 바뀔 것”이란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중소기업에 좋은 인재 안 가기 때문에 연구개발비 지원해도 제대로 연구할 사람이 없다”며 “고급 두뇌집단이 모여 R&D만 전문으로 할 수 있는 기업을 만들고 이들이 중소기업 R&D를 구조적으로 지원케 하겠다”고 설명했다.
대학도 적극적으로 참여시킬 계획이다. 그는 “서울대에만 공대 교수가 300여명에 달하고 그 밑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학생이 3300여명에 이른다”며 “전국 대학의 공대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참여한다면 어마어마한 R&D 인력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출연연구기관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에 기술을 제공하는 게 연구기관의 ‘본연의 업무’가 된다면 기업에 ‘기술이전’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평가하는 연구개발비 지원”
기존 연구개발 예산 배분에 대해 그는 한마디로 “비전문가들이 평가하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작은 이해관계라도 있으면 평가에서 제외하는 바람에 평가위원회에 비전문가들만 득실거린다는 것이다. “한국같이 좁은 나라에 이해관계가 안걸린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이런 사람 모두 배제하고 비전문가들이 연구개발 예산을 배분하니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제대로 된 성과가 안 나온다”이라고 진단했다. 평가시스템이 이렇게 된데 대해 그는 “감사원 감사를 걱정해 정책의 실효성은 생각 안하고 ‘책잡힐 짓 안했다’고 만족하는 것은 공무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진짜 전문가를 제값을 주고 평가위원으로 앉히고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중소기업들만 참여하는 조달시장도 개혁 대상이라고 주청장은 말했다. 그는 “조달시장만 공략하면 먹고살만 하다고 생각하는 기업인이 있다면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라며 “앞으로 조달시장은 해외진출의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게 변화시키겠다”고 밝혔다. 해외진출을 염두에 두지 않고, 내수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에는 불이익을 주거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해외 매출이 일정비율을 넘는 업체에만 공공입찰 참여기회를 주는 방안 등을 검토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중소기업 지원 시스템도 개선하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은 R&D, 마케팅 지원이 다 별개로 진행되고 있다. R&D 지원해 제품을 개발하며 마케팅도 지원해야 줘 성공시켜야 하는데 모든 정책이 따로 놀아 지원을 받지 못하면 허사”라고 지적했다. 한 기업이 집중적인 혜택을 받게 된다는 문제도 있지만, 해외시장에 진출해 성공한 사례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산업정책은 미시적으로 가야
주 청장은 제조업 부흥을 내걸고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미국 일본과 달리 한국에는 산업정책이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시대가 변해 산업정책이 보이지 않는 정책으로 바뀐 것”이라는 의견을 내놨다. 과거 한국은 큰 정책을 썼다고 했다. “환율, 금리 등 거시적 산업정책과 대표선수인 대기업을 뽑아 해외로 보내는 게 산업정책이었다”는 말이다. 대기업은 실무를 담당해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정책은 60년간 기적을 만든 성공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산업의 지도가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대기업들은 시장이 있는 곳, 즉 해외로 나갔고 낙수효과는 사라졌다. 따라서 이들의 빈 공간을 중소, 중견기업들이 메워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맞는 정책은 “과거와 같은 거시적 정책이 아니라 미시적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주청장은 “창조경제는 각 기업단위의 경쟁력을 키우는 미시적 정책”이라며 “이 정책은 개별 산업과 기업의 조건에 맞게 집행되기 때문에 세밀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독일 영국에서 배워야
한국 제조업이 살기 위해 벤치마킹해야 할 국가로는 독일과 영국을 꼽았다. 주 청장은 “독일 산업생태계는 완벽하다. 대기업 중견기업 중소기업 기술전문회사 대학 연구소가 긴밀하게 협력하며 산업경쟁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 생태계에 끼어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독일의 이같은 시스템은 100여년을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쫓아가기 힘든 “궁극적 목표”라고도 했다.
중간 단계에서는 영국을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영국에는 BSI(business innovation skilsl)라는 조직이 있다. 한국의 산업통상자원부, 미래창조과학부, 고용노동부에 대학 교육까지 관할하는 부처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말했다. 영국에선 고등학교까지 인성과 창의성 등을 길러주는 교육을 교육부다 담당하고, 대학부터는 비즈니스와 연결된 교육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 덕분에 기업의 인력 연구개발 등 필요한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지역별 클러스터로 발전해 지역산업발전에 기역하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런 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한국에는 생태계란 개념이 없어 각자도생을 하고 있다”며 “너죽고 나살자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생태계 게임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청의 향후 정책도 중소기업들이 각자 살기 위해 하고 있는 게임을 중소기업, 중견기업, 대기업이 함께 사는 게임으로 바꾸는 생태계 조성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대기업에만 근무해 중소기업을 잘 모른다고 지적하는 분들도 있지만 중소기업 문제는 중소기업만 보면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라고 강조했다.
◆중견기업 대기업 품 벗어나야
주 청장은 중견기업을 ‘애 어른’으로 비유했다. ‘덩치(매출)만 컸지 기술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중견기업이 대기업과 관계로 먹고 사는 시대는 지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중견기업은 기술 경쟁력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대기업 하청에만 의존하는 중견기업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차 협력사중 매출 1조원을 넘는 회사가 16개지만 상호출자제한을 받을 정도로 성장한 회사는 한 두개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중견기업에 머물러 있으며 세계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기술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심하게 표현하면 대기업과 관계만 잘 맺으면, 짤리지 않으면 살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왔다”고 덧붙였다. 주 청장은 “이런 회사들은 달걀을 한바구니에 담는 위험한 상태에 있다”며 “이런 종속적 상태에서 동반성장은 말이 안된다”고도 했다.
대기업의 가격후려치기에 대해 “대기업 욕하는 분들이 그 자리에 가면 어떨까 생각해봐야 한다. 100원 깎아야 하는데 50원만 깎았다는 것을 회사가 알면 그 사람은 다음날 사표 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했다. 이어 “한 사람에게 자신의 목을 걸어가면서 동반성장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시장을 모르는 순진한 얘기”라고 덧붙였다.
주 청장은 “정말 가격후려치기를 막고 싶은데 이를 할수 있는 방법은 하청업체가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기술력을 키워 해외로 나가 고객을 다각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대기업이 가격을 후려치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돼 있어야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이미 ‘검증’ 됐다는 게 그의 얘기다. 주 청장은 “일본에는 전문기술을 갖춘 교토식 기업이 있고, 계열화된 도쿄식 기업이 있는데 살아남은 기업들은 대부분 교토식 기업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해외로 나가 생존하고 성장했다는 것이다. 중견기업들도 교토식 기업들처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에 납품한 기록을 가지고 해외로 나가 성공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는 “이런 중견기업들의 성공은 거꾸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더 강하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중견기업들이 해외로 나갈 수 있도록 ‘월드클래스300’ 등 지원사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겠다고도 했다.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해외에서 성공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중견기업 정책에 대해 성과를 따지는 것은 너무 성급하며 10년 정도는 참아줘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창업 서비스 치중 걱정된다
최근 불고 있는 창업열풍에 대해선 “배달의민족 같은 모바일 앱이 성공하면 우르르 비슷한 앱이 생긴다”며 “이런 분위기에서는 잘되는 회사도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런 서비스 창업은 기술 장벽이 없어 글로벌로 나가선 경쟁이 어려운데 너무 많은 창업이 서비스쪽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특허, 노하우 등 기술기반 창업이 늘어야 창업의 질이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창업지원에 대한 문제의식도 얘기했다. 그는 “특허가 중요하지만 특허 몇개 나오면 평가 잘받고 너무 따지는 것을 보면 답답하다”고 했다. 특허만으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 청장은 “세계적으로 특허를 내지 않는 추세다. 복제할 수 없는 기술, 또는 암묵지라고 부르는 것을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고 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에 대해서는 “글로벌 경쟁을 하는 품목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든 제한 없이 사업을 하게 해줘야 한다”며 “하지만 동네 빵집과 같이 지역화 된 사업은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을 보호하고 대기업 진출을 엄격하게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준/안재광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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