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법 무시하는 지방조례] "녹지지역에도 공장 지을 때 조경하라"는 조례…상위법엔 조항 없어

입력 2016-02-18 18:59
입법 전문성 떨어지는 조례

법제처 등 전문기관 안거쳐 지자체 자체 심사로만 제정

경기 950개·경북 842개 등
기초 시·군 많은 광역도(道) 불합리한 조항 '수두룩'

"연 1회 이상 조례 일제 정비…전문성 강화 방안 서둘러야"


[ 강경민/고윤상 기자 ]
건설업체 A사는 2014년 B시가 조성한 산업시설용지 사업시행사로 선정됐다. 부동산 경기 침체가 계속되자 A사는 결국 분양 촉진을 위해 조성원가보다 낮은 가격에 용지를 분할해 분양할 계획을 세웠지만 B시의 반대에 부딪혔다. B시는 ‘사업시행자가 조성된 산업시설용지를 분할해 분양하는 경우 조성원가보다 높거나 낮은 가격으로 분양할 수 없도록 한다’는 조례를 반대 이유로 내세웠다. 하지만 상위법령인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시행령은 분양촉진 등을 위해 필요한 경우 분양가격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난해 시 외곽의 녹지지역에 공장을 지으려던 C사는 D시의 건축 조례에 따라 나무를 심는 조경작업에 착수했다. 작업을 진행하던 중 C사는 뒤늦게 조례가 상위법에 근거가 없는 규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瓚㏏萱?건축법에는 녹지지역에 건물을 짓더라도 조경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2011년 삭제됐다.

상위법과 충돌하거나 상위법에 근거가 없는 조례 및 규칙으로 인·허가를 받지 못해 기업 투자가 무산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같은 불합리한 지방 규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정부가 추진하는 규제개혁의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법체계는 헌법을 기본 토대로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부령 및 조례·규칙 등 자치법규가 위임 관계를 통해 연결돼 있다. 법률, 대통령령, 총리령·부령은 정부 입법을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관인 법제처가 심사한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가 정하는 조례는 법제처의 심사를 받지 않는다. 중앙행정기관인 법제처는 지자체의 자치법규에 대해 심사할 권한이 없다.

지자체와 지방의원들이 발의하는 조례는 지방의회의 상임위원회 소속 수석전문위원들의 심사를 거친다. 이어 지방의회 사무처와 관련 지자체 담당부서의 검토를 거친 후 지방의회에 회부된다. 법제처라는 전문 기관의 심사를 거치는 법률과 달리 지자체와 지방의회 인력만으로 조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제·개정된 조례는 지자체를 관할하는 행정자치부에 형식적으로 전달될 뿐이다.

국무조정실과 법제처, 행자부의 전수조사 결과 전체 조례·규칙 8만7613개 중 7.4%인 6440개의 조례 및 규칙이 △상위법령 위반 △상위법상 근거 없는 규제 △상위법령 제·개정사항 미반영 등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역별로는 경기도가 950개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상북도(842개) △전라남도(739개) △경상남도(612개) △강원도(547개) △충청남도(514개) △전라북도(486개) 등의 순이었다. 기초 시·군이 많은 도일수록 불합리한 조례가 많았다. 서울(404개), 부산(234개) 등 특별·광역시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행자부 관계자는 “사무처 기능이 잘 갖춰진 특별·광역시의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초 시·군의 입법 전문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특별·광역시도 각각 산하 자치구가 있지만 인·허가를 판단하는 권한은 대부분 특별·광역시에 집중돼 있다. 자치구가 정하는 조례도 광역시가 만든 조례 문구를 일부만 수정한 것이 대부분이다. 반면 광역도 산하 기초 시·군은 독자적으로 조례를 정하고, 인·허가 권한도 갖는다.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사례 대부분이 기초 시·군의 조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행자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연말까지 불합리한 조례 6440개의 정비를 마무리하겠다는 방침이다. 최병대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불합리한 규제 정비는 일회성으로 끝나면 효과가 없다”며 “최소한 1년에 한 번 이상 법제처와 행자부 및 지자체가 지방 조례를 일제히 정비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제처는 지난해부터 상위법에 어긋나는 조례가 정해지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자치법규 입법 컨설팅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조례를 입안할 때 지자체가 해당 조례안이 상위 법령에 위반될 소지 등이 없는지 법제처에 자문하면 법제처가 이를 검토해서 알려주는 방식이다. 최 교수는 “지방공무원들도 법제심사 업무를 경험할 수 있도록 전문성을 강화하는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강경민/고윤상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