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원장의 파격…분당서울대병원 '혁신 바람'

입력 2016-02-10 19:12
"논문 그만 쓰고 현장서 쓸 수 있는 아이디어 내라"

직원이 제안한 중심정맥관 수술세트 작년 상품화 성공

헬스케어파크 올 문열어
아이디어 산업화로 창업기지 도약 꿈꿔


[ 이지현 기자 ] “논문 그만 쓰고 현장에 반영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라.” 지난해 이철희 분당서울대병원장(사진)은 병원 교수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이 병원의 논문 건수는 연 1200여건. 국내 대학병원 중 최고 수준이다. 논문 성과를 포기하고 아이디어를 잡겠다는 이 원장의 선언은 의료계에선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 원장이 이처럼 자신 있게 변화를 외친 것은 각종 경영혁신 성과물 덕분이다. 한 직원이 낸 혁신 아이디어는 삼성서울병원, 서울아산병원 등에 납품하는 제품으로 탈바꿈했다. 간호사와 의사들이 낸 아이디어는 의료 질을 높이고 환자 불편을 줄이는 데 활용되고 있다.

◆‘자율적 혁신’ 실험

지난해 병원은 미산코퍼레이션을 통해 중심정맥관 삽입술 도구를 하나로 모은 ‘안셋’을 출시했다. 중심정맥관 삽입술은 작고 유연한 관을 심장 바로 위에 있는 굵은 정맥에 넣는 시술이다. 몸속에 항암제를 주입하거나 혈액투석 등을 할 때 주로 활용된다.

세트는 핀셋, 가위, 칼, 주사기, 주사침, 거즈, 수술용 덮개 등으로 구성됐다. 모두 일회용이다. 그동안 시술을 하려면 따로 보관하던 이들 도구를 하나씩 빼내 한곳에 모아야 했다. 포장을 뜯은 뒤 도구를 들고 오가지 않아도 돼 감염 위험도 낮아졌다.

3만원대인 안셋은 분당서울대병원에서만 한 해 2000~3000개 사용된다. 주요 대형병원에도 납품 계약을 체결했다. 김민정 경영혁신팀 전담 간호사는 “직원이 낸 경영 혁신 아이디어가 상용화된 것으로, 병원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환자 불편 줄이는 아이디어도

이 원장의 ‘자율적 혁신’ 실험은 의료 질을 높이고 환자 불편을 줄이는 데도 활용되고 있다. 신생아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빨기’ 반응이 좋은 신생아의 치료 효과가 좋다는 데 착안해 신생아 빨기 운동을 개발했다. 모든 간호사가 운동법을 익힌 뒤 매일 신생아들에게 훈련을 시켰다. 아이들의 입원 일수가 1.5일 줄고 발육도 좋아졌다.

위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낸 아이디어로 ‘위암 수첩’도 제작했다. 그동안 암 환자들은 본인이 받은 수술이 어떤 수술인지, 언제 검사를 하고 외래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와야 하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안내받지 못했다. 수첩은 이 같은 불편을 해결했다. 모두 직원들의 자율적 아이디어에?시작된 결과물이다.

◆헬스케어혁신파크는 창업기지

분당서울대병원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의 혁신 모델을 벤치마킹해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율적 혁신’ 모델을 구성했다.

이 원장은 취임 직후 혁신팀 회의를 직접 주재했을 정도로 안착에 공을 들였다. 혁신 아이디어를 내는 체인지에이전트는 전 직원의 15%에 달한다. 최근에는 현대카드 등에서 이 병원의 경영 혁신전략을 배우기 위해 다녀가기도 했다.

‘자율적 혁신’ 모델은 점차 진화하고 있다. 이 원장은 직원들이 일정 비용을 출자한 직원 조합을 조직해 아이디어 상용화에 투자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의료계에선 첫 시도다.

올해 병원은 ‘자율적 혁신’ 실험 무대를 병원 밖으로 넓힐 계획이다. 이 병원 의사들은 진료 아이디어를 산업화하기 위해 미국을 수차례 다녀왔다. 상반기 중 병원은 경기 분당 LH(한국토지주택공사) 부지에 7만6033㎡ 규모 헬스케어혁신파크 문을 연다. 바이오벤처 등과 함께 병원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교류의 장이다. 병원 관계자는 “헬스케어혁신파크가 문을 열면 병원 안에서만 맴돌던 아이디어들이 바이오산업 현장으로 퍼져나가는 창업기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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