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APEC 정상들의 두루마기 패션쇼

입력 2016-01-26 17:59
이영희 < 메종 드 이영희 대표 leeyounghee@daum.net >


2004년 정부에서 연락이 왔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내년에 부산에서 열릴 예정이니 회의에 참석할 각국 정상이 입을 한복을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APEC 정상회의에서는 회원국 정상들이 회의 개최국의 민속의상을 입어 보는 공식 행사가 유명하다. 나는 두루마기를 제안했다. 두루마기는 남녀 구분 없이 잘 어울리며, 양복 위에 입어도 품위가 있다.

회원국 정상은 모두 21명. 가장 고민한 건 색이었다. 모두 같은 색의 옷을 입힐 수는 없고, 그렇다고 튀는 원색의 옷을 입혔다간 나란히 섰을 때 조화를 이룰 수 없다. 사람끼리의 조화, 옷을 입는 환경과 사람 간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APEC 회담 장소인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를 답사하면서 “이 아름다운 자연 환경의 색을 따라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다와 하늘의 쪽빛, 황토의 황금빛, 기와의 회색, 소나무의 녹색 등 다섯 가지 색을 선택했다.

두루마기 옷감은 자미사(紫薇絲:비단의 한 종류로 봄·가을 옷에 자주 쓰임)를 골랐다. 또 십장생 문양을 넣어 외국 정상들이 한국의 전통문화가 지닌 資見?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APEC 회원국 정상 중 가장 신경이 쓰인 인물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였다. 다른 정상들은 모두 신체 치수를 미리 보내 왔는데 그의 치수만 매우 늦게 도착했다. “그가 다른 회원국에서 열린 APEC 회의에서 민속의상을 입었는데 너무 안 어울려서 불쾌해 했고, 그 이후 민속의상에 거부감을 표시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정상들보다 이틀 먼저 옷을 입어 보겠다”는 연락도 왔다.

APEC 정상회의 행사 당일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각국 정상이 보였다. 나는 정상들의 옷매무새를 다듬어줬다. 자신들이 입은 옷을 만든 디자이너가 나라는 사실을 들은 각국 정상은 내게 찬사를 건넸다. 특히 부시 대통령은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겐 아무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저 우리 옷을 제대로 입어 한복의 우수함과 아름다움이 느껴졌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내가 만든 두루마기를 입은 APEC 21개 회원국 정상들은 평생 잊지 못할 ‘패션모델’이었다. 부산 APEC 정상회의는 프랑스 파리의 첫 데뷔 무대만큼이나 감동을 준 패션쇼였다.

이영희 < 메종 드 이영희 대표 leeyounghee@daum.net</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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