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정적 수익 내는 인프라를 선점하라
호주 전력설비 공기업 매물 놓고 글로벌 국부펀드 등 30여곳 격돌
한국·중국·호주 2조 인프라펀드…일본·캐나다 최대 연기금도 협력
정부와 기업 손잡은 중국·일본, 신흥국 시장서 공격적 행보
[ 안상미/이현진 기자 ]
작년 7월 호주의 트랜스그리드가 매물로 나왔을 때 세계 연기금들은 ‘오랜만에 쓸 만한 물건이 나왔다’며 입맛을 다셨다. 호주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뉴사우스웨일스주(475만명)의 송·배전을 담당하는 공기업으로 효율성이 높았고 매년 안정적인 수익 확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11월께 입찰자를 확인한 인수 후보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4~5곳의 연기금과 운용사가 2~3곳 정도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경쟁을 벌이던 것과 달리 글로벌 국부펀드와 연기금 등 30곳, 6개 컨소시엄이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민연금을 비롯해 세계 ‘큰손’들이 이 딜을 위해 집결한 것이다. 낙찰가는 75억달러로 전문가들의 예상을 20% 이상 뛰어넘었다. 아부다비투자청(ADIA), 캐나다 퀘벡투자신탁기금이 주축이 된 ‘헤이스팅스 컨소시엄’은 “주민을 위해 전기 공급가격을 인하하겠다”는 파격 제안까지 내놓아 계약을 따냈다.
◆“인프라 투자비 매년 5000억달러 부족”
연기금 국부펀드 등 글로벌 큰손들이 도로 철도 항만 발전소 등 각국 인프라 시장에서 치열한 투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규모에 상관없이 웬만한 입찰에는 각국 ‘대표선수’가 대부분 참여해 맞붙는다.
인프라 자산은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투자하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어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채가 늘어난 각국 정부가 인프라 예산을 줄이면서 민간이 참여할 수 있는 투자 기회도 크게 늘어났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흥국에서는 경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 투자 비용과 정부 예산 간 차이인 ‘인프라 갭(gap)’이 크게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맥킨지에 따르면 2030년까지 세계적으로 총 57조달러의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뉴욕에 있는 대형 자산운용회사 얼라이언스번스타인(AB)의 게리 제닝스 인프라 글로벌 대표는 “각국 정부의 예산 부족으로 세계에서 매년 5000억달러가량의 인프라 갭이 발생하고 있지만 은행들의 인프라 관련 대출 능력은 3000억달러 정도”라며 “연기금 국부펀드 등 큰손들에 매년 2000억달러(약 240조원)의 투자 기회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투자파트너는 국적보다 이해관계
인프라 투자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글로벌 큰손 간 합종연횡도 일상화하고 있다. 자금이나 정보를 갖고 있고 이해관계가 맞으면 국적을 따지지 않고 투자 파트너로 삼는다. 국민연금은 호주 퀸즐랜드투자청(QIC), 중국투자공사(CIC) 등과 함께 30억호주달러(약 2조5000억원) 규모의 인프라 펀드를 조성했다. 세계 최대 연기금인 일본공적연금(GPIF)은 캐나다 최대 공무원연금인 온타리오공무원퇴직연금(OMERS)과 인프라 펀드에 공동 투자하는 협정을 맺었다. 펀드 규모는 5년간 최대 27억달러(약 2조7000억원) 수준이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는 “온타리오공무원퇴직연금이 인프라 투자 경험이 전혀 없는 일본공적연금과 손잡은 것은 빅 뉴스였다”며 “세계 인프라 개발 관련 정보력이 막강한 일본 종합상사들과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흥국서 격돌한 중국·일본
최근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중국과 일본의 연기금들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신흥국의 대형 투자 건에는 정부와 기업들까지 가세해 양국 간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보험회사 및 연기금들이 자국 정부 주도로 출범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400억달러 규모의 실크로드기금을 활용해 아시아 각국의 교통, 에너지, 항만 등 인프라 투자에 닥치는 대로 자금줄을 대고 있다. AIIB는 출범 첫해인 올해만 최대 12억달러를 인프라 자산에 투입할 계획이다. 인프라 투자전문 사모펀드(PEF)인 이큐파트너스의 김종훈 대표는 “중국 기관투자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작년 11월 아시아개발은행(ADB)과 함께 2020년까지 아시아 지역 인프라 개발에 1100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거대한 일본 퇴직연금들을 앞세워 아시아 인프라 선점에 나설 계획이다. 가와사키 다쓰오 유니슨캐피털 대표는 “경제산업성 산하 일본국제협력은행(DBJ)과 일본기업연금연합회(JBIC), 일본무역진흥기구(JETRO) 등이 갖춘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글로벌 인프라 투자 기회를 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국내 연기금들은 아직 ‘신중 모드’다. 한 국내 연기금 관계자는 “정부와 기업 간의 협업체제가 중국, 일본에 비해 뒤처진 상황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떠안기에는 무리”라고 말했다. 국내 최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투자자산 가운데 인프라 비중은 2.9%로 글로벌 연기금 중 가장 낮은 수준이다. 또 다른 국내 연기금 관계자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는 투자 리스크(위험)가 큰 개발 초기 단계 사업이 많다”며 “수익성보다는 안정성에 초점을 둔 국내 연기금들의 의사결정 체계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털어놨다.
싱가포르·홍콩=안상미 기자/도쿄=이현진 기자 saramin@hankyung.com
증권부 특별취재팀 이건호 차장(팀장), 샌프란시스코=고경봉 차장, 뉴욕=유창재 기자, 런던·암스테르담·밀라노=좌동욱 기자, 홍콩·싱가포르=안상미 기자, 도쿄=이현진 기자/염지원 ASK사무국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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