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5)
어떤 역사적 사건이 괜히, 갑자기, 느닷없이 터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요. 특히 고종 임금 때 일어난 그 숱한 사건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그 사건들은 한 줄로 세워도 될 정도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분명합니다. 갑신정변도 정변 자체는 실패했지만 다음 사건에 대한 원인을 확실히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이 이후 조선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조선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톈진조약
일본은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지요. 군사를 보내 고종을 호위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슬그머니 손을 뗐습니다. 그런데 정변의 과정에 피해를 입었다고 조선과 청나라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과는 한성조약을, 청나라와는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 톈진조약이 문제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일본, 청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는 자기네끼리 서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 조선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약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톈진조약은 이후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요. 청나라의 힘으로 갑신정변을 막았다고 생각한 조선 왕실은 청나라에 더욱 의존했습니다.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내정 간섭을 하였지요.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에서 여러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렇게 이웃 나라들이 서로 조선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조선의 조정은 적절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습니다.
왕실과 조정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안 자기밖에 모르는 부패한 관리들은 백성들을 사정없이 착취했습니다. 안 그래도 가난하던 조선의 백성들은 더욱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요. 조정이 힘이 없으니 관리들이 통제도 안 되고 나라 전체의 기강이 서지 않았습니다. 나라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고 사회 질서는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백성은 동학이라는 종교에서 위안을 찾았습니다. 동학은 “인간은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내세웠습니다.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한편,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며 이상적 사회 건설을 꿈꿨던 동학에 많은 사람이 매력을 느꼈습니다.
고부 농민들의 분노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
만일 여러분의 가정이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는다면 여러분은 어떤 태도를 취하겠습니까? 그냥 몰라라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까요? 아니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가족이 힘을 합해 노력할까요? 어른들이 정신없는 틈을 타서 멋대로 행동하고 나쁜 길로 빠져드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의 경우라면 그 가정은 불행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망해가는 조선에는 마지막 경우와 같은 관리가 많았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은 1892년 전라북도 고부에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지요. 그는 백성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세금을 내게 했고 이유 없이 백성의 재물을 빼앗았습니다. 안 빼앗기려는 사람은 관가로 데려가 무자비하게 형벌을 가했습니다. 조병갑은 가지가지 이유를 만들어 백성들을 수탈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는 비각을 세운다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다고 많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고부 농민들은 조병갑의 횡포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은 사발통문을 돌렸습니다. 사발통문은,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처럼 중앙의 작은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 명단을 둘러 적은 문서입니다. 이는 주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명단을 만드는 방법이지요. 전봉준 등 20여명의 이름이 쓰인 사발통문에는 조병갑을 처단하고 전주 감영을 함락시키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전주성 점령
이 사발통문의 결의가 실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은 1894년 1월이었습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 1000여명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말목장터에 모였습니다. 그들의 손에는 倫ː?농기구가 들려 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해가 갑오년이라 이 사건을 갑오농민운동이라고도 합니다.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점령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은 새로운 관리 이용태를 보내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요. 그런데 이용태는 농민들을 달래기는커녕 동학교도를 탄압하는 데만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봉준은 이웃 고을의 동학교도에게 통문을 돌렸습니다. 1000명으로 시작한 농민 운동이 1만명의 대규모 봉기로 발전했습니다.
전봉준은 농사를 지으며 동네 아이들에게 훈장 노릇을 하던 인물이지요. 그는 살인이나 재물을 빼앗는 것을 금지하는 등 규율을 강조하며 농민군들에게 군사 훈련도 했습니다. 농민군은 4월 초 정읍의 황토현에서 관군을 크게 무찌르고 4월 말에는 마침내 전주성을 점령하였습니다.
다급해진 조정은 청나라에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지요. 청나라의 군대가 충남 아산만에 상륙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군대를 보냈습니다. 물론 조선은 일본군을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톈진조약이 일본군의 상륙을 허락한 것입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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