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위기 때 더 빛나는 국가와 국기

입력 2016-01-19 17:47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파리가 피로 물든 두 달 전. 연쇄 테러 소식을 접한 축구장의 8만여 관중은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대피했다. 사흘 뒤 올랑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상·하원 의원 900여명과 기립해 국가를 합창했다.

다음날 런던에서 열린 프랑스-영국 축구경기 때 수만 관중이 희생자를 애도하기 위해 프랑스 국기를 흔들며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두 번이나 불렀다. 영국 선수단이 자국 국가 대신 프랑스 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그랬다.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 합창단은 공연 시작 전 관객과 함께 프랑스 국가를 열창했다. 유니언스퀘어에 모인 추모객들도 그랬다. 이 노래는 반(反)테러의 상징이 됐다.

反테러 상징이 된 프랑스 國歌

나치 점령 시절에 프랑스 레지스탕스들도 국가를 부르며 용기를 냈다. 험프리 보가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영화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장면도 유명하다. 카페에서 독일군들이 군가를 부르기 시작하자 레지스탕스 지도자의 선창으로 프랑스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라 마르세예즈’를 합창하며 독일군을 압도하는 대목이 감동적이다.

세계 최대 다민족·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3억 인구를 하나로 묶는 힘도 국가와 성조기에서 나온다. 성조기는 우주선에서부터 생활 잡화까지 모두 아우르는 단일 브랜드다. 패션뿐만 아니라 속옷 디자인에까지 다양하게 활용할 정도다. 중국과 베트남, 북한, 쿠바 등 옛 소련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은 국기에 별을 넣어 사회주의 연대를 강조한다. 이슬람 국가들이 초승달과 별을 그려 넣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국가와 국기에는 그 나라의 정체성이 압축돼 있다. 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결집력과 구심점이 거기에서 비롯된다. 나라가 환란에 빠졌을 때 서로를 보듬고 위무하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적 동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특정 세력이나 당파, 이해관계와 무관하다. 네 편 내 편을 따질 수 없는 국민 모두의 브랜드이고 자산이다. 노래의 무형자산과 깃발의 유형자산이 만나는 접점에서 애국심이라는 공감 가치가 싹튼다. 국가나 국기는 집권당 정부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 국가 전체를 상징한다.

애국심도 좌·우 따지는 우리

우리의 인식은 어떤가. 어느 정당은 태극기 대신 당기(黨旗)를 걸고 애국가 대신 운동가요를 부르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국기는 걸되 애국가는 부르지 않는 것으로 ‘진일보했다’고 자랑한 경우도 있다. 광화문 광장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것조차 소모적인 논쟁에 갇혀 지지부진한 게 우리 현실이다. 전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전직 대통령 묘소를 ‘반쪽 참배’하는 정치인까지 있으니, 애국심에도 좌·우를 따지느냐는 말이 나온다. 일부 교과서와 교사들마저 국가와 국기를 놓고 ‘강요된 조국애’라는 등 편 가르기를 서슴지 않고 있다.

프랑스 국가의 가사는 섬뜩할 정도로 전투적이다. ‘적들의 더러운 피를 우리 밭고랑에 뿌리자’ 등 너무 잔인해서 가사를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다. 미국이나 중국, 독일 등도 대부분 전쟁 가사다. 그런데도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전 국민이 이를 통해 단결한다. 우리도 애국가와 태극기 아래 하나가 돼 갈등과 대결을 극복하고 위기를 이겨낼 힘을 모아야 한다. 더구나 우리 애국가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가사를 담고 있지 않은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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