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성소피아 성당

입력 2016-01-13 17:42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1453년 5월29일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됐다. 6주간의 포격 끝에 이곳을 점령한 오스만의 메흐메드 2세는 입성하자마자 성소피아 성당부터 찾았다. 성당의 흙을 머리에 뿌리며 이슬람 영토가 된 것을 기념한 그는 이를 파괴하지 않고 모스크(이슬람 신전)로 사용할 것을 선언했다.

이 덕분에 성당과 연결된 총대주교 자택 통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무사했다. 벽면의 성화도 훼손하지 않고 석회칠로 덮었다. 건물 밖에 네 개의 첨탑이 추가된 게 그나마 큰 변화였다. 이 건물은 이후 수많은 모스크의 모델이 됐다. 도시 이름도 이슬람이 많은 곳이라는 뜻의 이스탄불로 바뀌었지만 성당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모스크의 상징이 됐다.

성당이 파괴된 것은 그 전의 지진과 화재 때문이었다. 4세기에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처음 건립됐다가 여러 번 소실된 뒤 6세기에 재건됐으니 역사도 길다. 규모로는 16세기 전후에 등장한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바울로 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에 이어 네 번째이지만 현존 교회 중 가장 오래됐다.

1850년 보수 공사 때 9~12세기 모자이크가 대거 발견됐다. 1923년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뒤 박물관으로 변신하는 과정에서는 더 놀라운 것들이 드러났다. 회칠을 벗겨내자 500년간 잠자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로 된 성화들이 온전히 나타났다. 이것이 알라의 이름과 코란 구절을 새긴 이슬람 성물들과 공존하고 있다.

이는 이슬람의 개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슬람은 그리스·로마 등의 지중해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를 융합하면서 공존과 관용의 문명권을 형성했다. 인도·중국의 경계에서 이탈리아·프랑스 변경까지 방대한 영역을 통합한 힘도 여기에서 나왔다. 처음엔 무력으로 점령하지만 나중엔 종교를 매개로 융합하는 방식이다. 그 특유의 포용력이 유럽 문화 부흥의 토대까지 만들었다.

이런 곳에서 이슬람국가(IS) 대원의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사상자가 20여명이 되는 참사다. 폭탄은 성소피아 성당이 있는 술탄아흐메트 광장 주변에서 터졌다. 희생자 대부분이 독일 사람인 것으로 봐서 중동 난민 수용에 앞장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압박하려는 의도라는 분석도 나온다. 성당을 처음 건립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모스크로 바뀐 뒤까지도 ‘성스러운 예지(叡智)’의 전당으로 불린 곳에서 무슬림의 테러라니 참으로 안타깝다. 이슬람의 개방성과 관용이 무너지고 있는 것인가.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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