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총수들 신년사로 본 위기극복 해법
"해야 할 일 충분히 못했다" 이건희 회장의 뼈저린 반성
"위기를 기회로 바꾸자" 정몽구 회장의 희망 찾기
"저효율 자산 과감히 정리" 구본무 회장의 질(質) 경영
"감 아닌 합리적 분석을" 조석래 회장의 경쟁력 강화
[ 남윤선 기자 ]
1997년 12월3일, 국가부도 위기에 처한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융자를 요청했다. IMF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했던 국민들은 ‘망국(亡國)’의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갑작스레 치솟은 환율과 추락한 국가신용등급에 기업들은 혼란에 빠졌고 불안에 떨었다.
국내 대표적 대기업을 이끌던 총수들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1월 초 신년사를 위해 직원들 앞에 섰지만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들은 신년사를 통해 그동안의 경영행태를 돌아보며 반성을 먼저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도 주문했다. 그렇다고 패배주의에 빠지진 않았다. 벼랑 끝에 섰지만 희망을 얘기했다.
이들의 다짐은 현실화됐다. 한국은 가장 빨리 IMF 구제금융을 갚은 나라가 됐다. 기업들의 경쟁력도 강화됐다. 당시 74조원이던 삼성그룹 매출은 300조원으로 불어났다. 끝없는 경기 불황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연상되는 요즘, 재계에서는 ‘1998년 정신을 배우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 “과거를 성찰하고 반성하자”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1998년을 맞이한 재계 총수들의 ‘일성’은 과거에 대한 성찰이었다. 변명보다는 뼈저린 반성을 앞세웠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신년사에서 “우리는 세계의 흐름을 억지로 외면해 온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달아야 한다”며 “기업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충분히 다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고 있다”고 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은 “우리 그룹이 추진하려고 했던 개혁을 좀 더 과감하게, 화급히 서둘렀으면 하는 아쉬움이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웅열 코오롱 회장은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빚으로 흥청거리고 제몫 찾기에만 급급했다”고 아쉬워했다.
(2) “단호한 구조조정을 단행하자”
재계 총수들은 성찰과 동시에 생존 방법도 제시했다. 단호한 구조조정이 그것이었다. 구본무 LG 회장은 “저효율 자산을 과감히 정리하고 철두철미한 내실 경영으로 현금 창출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삼구 당시 아시아나항공 사장은 “창업 때부터 획득을 위해 노력해 온 유럽노선 운항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만 다소 달랐다. 그는 “대우는 난관에 움츠리기보다는 확대지향적 경영으로 위기를 극복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원화가치 하락을 수출로 극복하겠다는 의지였다.
(3) “경쟁력을 강화하고 수출을 늘리자”
그렇다고 구조조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위기를 맞은 총수들은 경쟁력 강화 없이는 지속 가능한 기업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룹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과 같은 낡은 관행을 타파하고, 투명경영을 확립해 나갈 것도 주문했다.
정몽구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유지하고 계열사 간 상호지급보증 축소, 연결재무제표 작성, 사외이사제 확대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하자”고 밝혔다. 조석래 효성 회장도 “더 이상 감(感)에 의한 경영이 아닌 합리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인 경영을 실천해야 한다”며 체질 개선을 주문했다.
(4) “희망을 갖고 위기를 이겨내자”
총수들은 다른 무엇보다 희망을 갖고 위기를 극복하자고 주문했다. 벼랑 끝에 선 만큼 이들의 목소리엔 절박감이 배어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은 자포자기하는 정신적 패배주의”라며 “어떤 고통이 있어도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정몽구 회장은 “우리의 전통적 정신인 창조적 예지, 적극적인 의지, 강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이 상황을 기회로 바꾸자”고 주문했다.
재계 고위 관계자는 “지금 상황은 1998년과 비교하면 훨씬 나은데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냉소와 불만만 가득한 것 같다”며 “냉철한 과거 분석과 구조조정, 무엇보다 함께 극복해 나가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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