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선 한국호, 다시 기업가 정신이다 (5·끝) 정주영의 생산적 복지
[ 김순신 기자 ]
지난 16일 오후 5시 서울 가회동 재동초등학교. 정상 수업은 끝났지만 수십명의 학생이 발레, 음악 줄넘기 등의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인근 교동·청운초등학교 학생들도 와서 들을 수 있는 ‘방과 후 학습’ 시간이다. 재동초등학교는 1969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호 아산·峨山)이 주도한 ‘지역사회학교운동’에 힘입어 국내 최초로 지역민을 위해 방과 후 학습을 시작한 곳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아산이 지역사회학교운동에 뛰어들면서 굳게 닫혀 있던 학교 문이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며 “‘방과 후 교실’은 국민의 교육 수준을 높여 생산성을 키우겠다던 아산의 교육복지 노력이 결실을 본 것”이라고 평가했다.
‘방과 후 교실’ 개념 첫 도입
1960년대 말 세계로 진출하려는 아산은 난관에 부딪쳤다. 부족한 인적 자원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공장을 건설해도 근로자를 뽑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떻게든 교육 기반을 확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교육환경 개선 없이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 한국의 고등학교 진학률은 30%를 밑돌았다.
그때 마침 ‘투 터치 어 차일드(to touch a child)’라는 영화를 봤다. 1930년대 미국 공업도시였던 플린트시에서 체육교사 한 명이 학교에 사람들을 모아 교육함으로써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었다. 아산은 비어 있는 학교 시설을 지역사회에 개방하면 지역민 자립에 필요한 교육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주 전 울산대 총장은 “아산은 세금으로 운영되는 학교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인식했다”며 “노는 학교 시설을 활용하자는 생각은 당시 ‘학교는 학생들만 다니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발상이었다”고 회상했다.
지역사회운동 조직화
아산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지역사회학교운동을 시작했다. 지역사회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학교 개방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반대도 거셌다. 그는 “우리나라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학교 시설이라도 활용하지 않으면 언제 나라가 발전하겠느냐”며 “학교 개방이 그렇게 힘들다면 내 회사 시설이라도 주민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개방하겠다”고 말하며 밀어붙였다.
1969년 1월24일 한국지역사회학교후원회(현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가 출범했다. 후원회가 설립되고 두 달 뒤인 1969년 3월, ‘지역사회민을 위한 학교’를 지향하는 재동초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이어 혜화·갈현초등학교도 교실을 개방해 주민을 위한 취미교실, 어린이 방과 후 활동 등을 시작했다. 지방에서 후원회 활동을 위한 세미나가 열리거나 회원들의 전국총회가 개최되면 아산은 반드시 참석해 특강하는 등 격려를 잊지 않았다.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는 전국 32개 도시에 지부를 두고 있을 정도로 커졌다.
유봉호 전 한국교육학회 회장은 “아산은 다른 기관은 몰라도 한국지역사회교육협의회 회장만은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다”며 “교육을 통한 국민 생활 수준 향상을 어린아이처럼 꿈꿨다”고 말했다.
아산은 그만큼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육환경 개선을 실천한 기업인이다. 김인자 한국심리상담연구소장은 아산이 서강대 강단에서 학생들과 나눈 대화를 잊지 못한다고 했다. 한 학생이 “회장님은 우리가 잘살게 될 거라고 하셨는데, 어떤 근거로 하신 말씀입니까”라고 물었다. 아산은 바로 답했다.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는 재원과 자원이 있어야 하는데, 그 두 개보다 더 중요한 게 인재입니다. 훌륭한 인재가 있어야 온 세계의 자원과 재원을 다 통제할 수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이 바로 그 훌륭한 인재가 돼야 합니다.”
의료복지 통한 노동 인프라 확충
아산은 벽지의 의료환경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해 병을 키우고 병치레하다가 』遠?탕진하는 일이 잦을 때였다. ‘빈곤의 악순환’을 벗게 하기 위해 아산은 1977년 7월1일 통 큰 결심을 했다. 현대건설 발행주식의 50%를 출연해 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또 연간 50억원씩 내서 병원 사업을 하기로 했다. 당시 현대건설 주식 50%의 가치는 400억원이었으며 요즘 돈가치로는 수조원을 웃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의 의료사업을 주관했던 김순용 대한병원협회 명예회장은 “아산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재단을 설립했다는 평가를 듣길 매우 싫어했다”고 전했다. 재단 설립 목적이 부를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취약지역의 노동력을 키워 결국 국내 노동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생산적 복지’의 개념이다.
아산이 개발 낙후지역에 우선적으로 병원을 세운 이유다. 당시 면 지역에 의사가 없는 무의(無醫)촌 비율은 전국 면 총수의 3분의 1에 달했다. 아산은 아산사회복지재단을 통해 전북 정읍을 시작으로 전남 보성, 강원 인제, 충남 보령, 경북 영덕 등 다섯 곳에 차례로 병원을 설립했다. 정읍병원을 착공한 무렵인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만 의료보험이 처음 실시됐다.
예상대로 병원 운영은 막대한 적자를 면하지 못했다. 아산은 그러나 “농어촌 벽지에 사는 주민들은 심각한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며 “국민의 건강 유지를 위해 의료진이 힘써 달라”고 독려했다.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도 아산병원을 설립했다. 정읍병원을 설립한 지 11년 뒤 일이다. 요즘에야 정부의 ‘퍼주기식 복지’를 두고 논란을 빚고 있지만 1977년 당시 복지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신낙균 전 국회의원은 아산의 선견지명을 이렇게 말했다. “창업자는 무엇이든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파악했습니다. 소떼 방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표현하고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에 기여하고 기업가로서의 경제성도 챙기고요. 개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순신 한국경제신문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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