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무 한국농어촌공사 사장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어"
[ 고은이 / 조진형 기자 ]
공부는 뒷전이었던 청년 시절
부모 일찍 여읜 뒤 조부모 밑에서 성장
대학 입학해선 학보사·연극에만 관심
할아버지 돌아가신 뒤 맘 잡고 절 들어가
반 년 만에 행시 합격…농림부서 공직 첫발
40년 농업 한우물…“할 일은 많다”
책상머리 정책보다 현장 뛰는 게 체질
새마을 홍보영화 만들며 일하는 재미 ‘흠뻑’
가장 큰 성과는 개방농정 기틀 닦은 일
“이젠 인생 후반전…농어촌공사 혁신에 보람”
이상무 한국농어촌공사 사장(66·사진)은 40년간 농업 한 분야만 판 전문가다. 농업구조정책국장 농어촌개발국장 기획관리실장 등 농업 관료의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농정(農政)을 하는 후배들이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한국의 농업 정책은 없다”고 말할 정도다.
서울 덕수궁길 한식 전문점인 콩두에서 이 사장을 만났다. 깔끔한 맛과 분위기 때문에 그가 자주 찾는다는 곳이다. 이 사장은 달변이었다. 질문을 던졌을 때 멈칫하거나 오래 고민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육하원칙 아래 핵심만 명쾌하게 말했다. 사람 이름이나 구체적인 장소도 대충 흘리지 않았다. 수십년 전 얘기를 꺼내도 마치 어제 일인 양 정확하게 설명했다.
국내 대표적인 농업 전문가지만 이 사장은 원래 농업 공부를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했다. 공무원도 딱딱한 이미지 때문에 하기 싫어했다. 서울대 농대를 졸업해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 관료를 거쳐 농어촌공사 사장까지 온 것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웃었다.
방황하던 사춘기
이 사장은 보리굴비 반상 코스를 익숙하게 주문하면서 학창시절을 회상했다. 전채요리로 새우완자를 곁들인 오디청 샐러드가 가장 먼저 나왔다. 바삭한 완자에 얹어진 상큼한 소스가 입맛을 돋웠다.
그는 사춘기를 ‘진하게’ 겪었다. 고등학교 때 껄렁한 친구들과 학교 담장을 넘어가며 막걸리집을 전전했다. 지금도 이 사장이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술꾼으로 통하는 이유다. 술값을 타내기 위해 집에 거짓말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는 “술 때문에 할아버지께 혼도 많이 났다”고 회상했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버릇없어질까봐 일부러 이 사장을 엄하게 대했다. 이 사장은 “그 기억 때문에 아직도 뭔가를 결정할 때마다 ‘할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한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이 사장에게 할아버지는 법대 ?진학해 사법고시를 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의 그는 법조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학문과 사회를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문리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건 할아버지가 반대했다. 차선책으로 생각한 게 서울대 농대였다.
“농업에 별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다보니 갔어요. 대학 입학시험 전날에도 농대 선배들이 환영해준다고 술을 잔뜩 먹여서 시험장에 취한 채 들어갔죠.” 이 사장의 주량은 가늠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요즘은 건강을 위해 자제한다. 이날도 술은 주문조차 하지 않았다.
“자네 같은 사람이 사무관이라니…”
그러다 보니 대학 때도 공부는 뒷전이었다. 술 마시는 것과 동아리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썼다. 농대생이었지만 농업에 관심은 거의 없었다. 대신 학교 신문사에 들어가 언론인을 꿈꿨다. 연극에 빠져 매일 술에 취한 채 연극 연습을 하기도 했다.
이 사장의 생활을 바꿔놓은 것은 대학 4학년 어느 날이었다. 인생의 버팀목으로 생각하고 있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벼락을 맞은 것 같았어요. 술만 마시지 말고 돌아가시기 전에 할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고시를 봐서 소원이나 풀어드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컸습니다.” 그해 바로 절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반 년 만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전해준 건 서울대 1년 선배였다. 그가 지금 이 사장의 아내다.
하지만 합격해 놓고도 쉽게 공무원의 길을 선택하진 못했다. 자신의 길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지막까지 기자가 되겠다고 버티다 삼촌 등쌀에 못 이겨 농림부 사무관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농림부 사무관 초년생 시절 서울대 농대 은사를 만난 일을 너털웃음을 웃으며 소개했다. “농림부에 들른 교수님이 절 보고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하고 묻더라고요. ‘농림부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교수님이 고개를 돌리면서 ‘자네 같은 사람이 사무관이라니 대한민국 농정이 걱정된다’고 한숨을 푹 쉬시더군요. 그때는 제가 그만큼 못 미더우셨나봐요. 하하.”
운명처럼 만난 새마을운동
1971년 말 새마을운동 업무를 맡게 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사무관 1년차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철학을 접하게 됐습니다. 이전까지는 세상에 대해 별로 긍정적인 생각을 못 했어요. 그런데 새마을운동 업무를 맡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이 사장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이 얇은 차돌박이 몇 점이 채소와 함께 나왔다. 양파와 초고추장을 곁들여 차돌박이를 씹으니 고소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는 직접 새마을 지도자를 찾아다녔다. 극작가와 영화감독, 배우들을 만나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도 기획했다. “공무원 생활 초반, 딱딱한 일반 정책 업무를 했다면 금방 흥미를 잃었을 겁니다. 새마을운동을 만나 신나게 일할 수 있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운명이었지요.” 당시는 박 대통령이 농업 소득과 식량, 녹색 혁명에 관심을 가지면서 농림부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때였다.
주메뉴인 보리굴비가 나왔다. 보성 녹찻물에 밥을 말아 짭짤한 보리굴비 한 점을 얹어 입 안에 넣어보니 밥 응?달큰했다. 이 사장은 밥 한 그릇을 녹찻물에 다 말고 후루룩 삼켰다.
농림부 공무원 시절 가장 뿌듯했던 일을 묻자 이 사장은 “개방 농정의 기틀을 닦은 일”이라고 답했다. 그는 미국 연수 기회를 얻어 미시간주립대에서 농업경제학과 농촌개발론을 공부했다. 3개월 동안은 유럽 7개국을 돌며 선진 농업도 둘러봤다. “해외 경험들이 개방 농정의 틀을 세우는 기초가 됐습니다. 우리 농정이 일본 정책을 그대로 베끼는 것에서 탈피해 이론적인 틀을 갖추게 된 게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이었지요.” 우루과이라운드(UR)로 한창 개방 바람이 불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 사장은 기존 중저가 농산품 위주의 농업으론 희망이 없다고 봤다. 고부가가치 농업을 키우는 게 답이라고 판단했다. 요즘 얘기하는 6차산업, 창조 농정, 스마트팜 등과 같은 맥락이다.
아쉬운 점은 없느냐고 묻자 1990년대에 짜놓은 개방농정 정책 기조가 계속 이어지지 않은 점을 언급했다. 이후 전통 농업에만 목매는 바람에 10년을 허송세월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짰던 농정 방향 그대로 갔다면 지금쯤 농업경쟁력이 훨씬 높아졌을 겁니다.”
인생 후반전 ‘진행 중’
그는 농림부 기획관리실장(1급)을 마지막으로 1998년 공직에서 나왔다. 채 쉰이 안 된 나이였다. 조직개편 과정에서 1급 자리 하나가 없어질 때 눈치보는 게 싫어 그만뒀다고 했다. 집에서 쉬다 UN 식량농업기구(FAO) 필리핀본부 주재 대표를 맡게 됐다. 만 50세가 되던 해 생일, FAO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탑승한 로마행 비행기에서 생각했다. “인생을 75세로 보면 25세까지 준비기, 25~50세는 전반전, 50~75세는 후반전이다. 내 인생에서 후반전이 시작됐다.” 전반전에 한국 농업정책을 했다면 후반전엔 세계 개발도상국의 농업·농촌 개발에 기여해보자고 결심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남북 농수산협력을 위한 사단법인 통일농수산사업단 대표로도 일했다. 금강산 협동농장 등 북한 농업 협력사업을 주도했다. 그때 얻은 북한 농업에 대한 지식과 네트워크는 지금까지 이 사장에게 큰 자산이다. 농어촌공사 사장이 된 이후에도 남북 농업 협력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을 3년째 개최하고 있다. 그는 “북한 농업을 재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며 “내년쯤부터 본격적인 남북 농업 협력이 구체화되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3년 농어촌공사 사장 취임식에서는 직원들에게 공사 위상을 바꿔놓자고 강조했다. 시키는 것만 하지 말고 농어촌 정책을 능동적으로 주도해보자는 것이었다. 일하는 방식부터 바꿨다. “전 회의를 안 합니다. 회의의 비효율성을 알거든요. 대신 모두가 공유하는 통신망으로 보고하라고 합니다.”
농어촌공사를 이끈 지난 2년에 대한 평가를 물었다. “공공기관이 정책을 주도하는 건 쉽지 않아요. 하지만 직원들의 자세와 인식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농촌과 농업을 한번 제대로 바꿔보겠다는 직원들의 의지가 충만합니다.”
■ 공무원들이 인정한 농식품부 ‘3大 천재’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오래 근무한 공무원들은 이상무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을 농식품부가 배출한 ‘3대 천재’ 중 한 명으로 기억한다. 창의적인 아 絹助楮?명쾌한 논리를 그의 강점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불필요한 격식은 싫어한다. 회의는 최소화하고, 보고는 대부분 모바일 등 온라인으로 받는다. 부하 직원에게 책임의식을 부여하는 조직관리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 이상무 사장의 단골집 ‘콩두’
백고동 전복밥·손두부 스테이크…창의적 한식 풍성
콩두는 모던 한식 레스토랑이다. 덕수궁 정원이 잘 내려다보이는 덕수궁길 서울시 지정 문화재 건물에 있다. “한식의 기초인 ‘장’을 기반으로 창의적인 음식을 만든다.” 콩두가 내세우는 음식 철학이다.
저녁 코스는 햇빛 코스와 물빛 코스로 나뉜다. 점심 메뉴는 이것보다 조금 더 저렴하다. 메인 메뉴는 보성 녹찻물을 곁들인 법성포 보리굴비 반상, 백김치를 곁들인 진안 손두부 스테이크, 백고동 전복밥 중에서 고를 수 있다. 보리굴비는 조선간장으로 담근 간장게장과 함께 나온다. 손두부 스테이크는 청국장 소스가 곁들여져 별미다.
전국 각지에서 공수한 신선한 지역 농산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모든 메뉴에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각 지역 명인과 장인이 직접 담근 장만을 엄선해 쓴다는 게 콩두의 설명이다. 전채요리는 계절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진다. (02)722-7002
■ 이상무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은
△1949년 경북 영천 출생
△경북고, 서울대 농학과 졸업
△미국 미시간주립대 농업경제학 석·박사
△농림수산부 농업구조정책국장, 농어촌개발국장, 기획관리실장
△일본 교토대 초빙교수
△중국 옌볜과학기술대 부설 동북아농업개발원 원장
△UN 식량농업기구(FAO) 필리핀 주재대표
△FAO 한국협회 회장
△여의도연구소 고문
△아시아태평양농업정책포럼 의장
△세계농정연구원 이사장
고은이/조진형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