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낙훈의 현장속으로
피스카스·이탈라·마리메코 등 거느린 디자인 대국 핀란드
헬싱키 부근 피스카스빌리지, 주민의 20%인 120명이 디자이너
366년 역사의 피스카스 그룹, 명품 디자인 가정용품의 강자
3년새 세계 3대 도자기브랜드 인수
파주 헤이리 화이트블럭 갤러리서 3개월간 27명 작품 전시
[ 김낙훈 기자 ] 한 나라의 지폐엔 그 나라를 상징하는 위대한 인물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대개 나라를 지킨 장군, 혁혁한 업적을 남긴 권력자 등이다. 하지만 핀란드는 다르다. 유로화를 쓰기 전 핀란드 지폐인 ‘마르카’엔 음악가인 장 시벨리우스와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가 들어가 있었다. 문화를 존중하는 핀란드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는 ‘작지만 강한 나라’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핀란드는 사우나와 자일리톨껌, 산타클로스로 유명한 나라다. 이에 못지않게 유명한 게 디자인이다. 이 나라는 디자인 강국이다. 디자인은 사회를 아름답게 가꿀 뿐 아니라 국가를 부강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핀란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4만2733달러로 한국보다 50%가량 많다. 인구로만 보면 540만명의 소국이지만 이 나라가 보유한 디자인 브랜드는 피스카스 이탈라 로얄코펜하겐 마리메코 웨지우드 로열달튼 등이 있다. 특히 최근 3년 새 로얄코펜하겐 웨지우드 로열달튼 등 3대 도자기 브랜드를 인수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인구 540만명의 디자인 대국
알바 알토는 바우하우스 창시자 발터 그로피우스와 미국 시카고 고층건물 설계에 기여한 로스 반 데어 로에 등과 더불어 20세기 건축 및 디자인 분야 거장으로 꼽힌다. 알바 알토의 맥을 잇는 핀란드에는 디자인 마을이 있을 정도다. 피스카스 빌리지로, 대표적인 디자인 기업이 동명의 피스카스그룹이다.
피스카스는 가위와 도끼 등의 생활용품으로 유명한 브랜드다. 이탈라는 유리공예, 로열달튼은 영국을 대표하는 도자기 브랜드로 왕실에 납품되는 제품으로 인지도가 높다. 로얄코펜하겐은 덴마크의 간판 도자기 브랜드다. 이들 브랜드는 모두 핀란드 기업인 피스카스그룹 소유다. 핀란드 사람은 마리메코 섬유와 아르텍 가구로 집안을 꾸미고, 이바나헬싱키가 디자인한 옷을 입으며, 할티나 루카의 스포츠웨어를 입고 운동한다.
예술인마을이 경쟁력의 원천
피스카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핀란드의 대표적인 디자인기업 이름이다. 또 하나는 지명이다.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차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피스카스 빌리지에는 600여명의 주민이 사는 데 이 중 120여명이 디자이너 설치미술가 등 예술가다.
피스카스 빌리지는 피스카스그룹 사 ?痔堅竪?하다. 이곳은 그룹의 모태가 된 곳이다. 예술가와 장인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문화 예술 공간으로 조성해 보존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1300만㎡ 규모다. 아티스트들이 입주한 공방, 숙박 시설, 전시 공간 등이 마련돼 있다.
이 빌리지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 3명이 지난 25일 내한했다. 카린 위드나스, 카밀라 모르베르크, 디파 판치아가 그들이다. 이들을 포함한 27명의 작품이 29일부터 내년 1월24일까지 약 3개월간 경기 파주시 헤이리에 있는 갤러리 화이트블럭(회장 이수문)에서 전시된다. 주요 작품은 컵, 램프, 유리조각, 샴페인글라스, 의자, 세라믹, 도자기 등이다.
전시 작가 중에는 피스카스그룹과 협업하는 디자이너들도 다수 있다. 1985년 피스카스 빌리지에 입주한 카밀라 모르베르크 씨는 “당시엔 디자이너가 20명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6배로 늘어났다”며 “주변 환경이 아름답고 임차료가 저렴한 데다 피스카스그룹이 여러가지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판 기업은 피스카스그룹
1649년 설립된 피스카스그룹은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366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가정용품, 정원용품, 아웃도어제품 등을 생산하고 있다. 대표적인 제품이 가위와 도끼다. 이들의 특징은 손잡이가 화려한 오렌지색이다. 가위는 인체공학적으로 설계돼 편안하면서도 적은 힘으로 물체를 자를 수 있게 디자인돼 있다. 피스카스그룹은 17개 브랜드에 연매출이 약 1조5000억원에 이른다.
최근에는 이탈라 로열달튼 웨지우드 등을 인수합병하며 사세를 키우고 있다. 세계 20여개국에 걸쳐 8400여명의 임직원이 일하고 있다.
피스카스그룹의 역사는 피스카스에서 시작됐다. 당시 핀란드는 제철산업이 활발했다. 주변 국가들과의 잦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제철소를 많이 설립했는데 피스카스도 그런 산업에 종사했다. 제철 공장에 이어 나이프, 포크와 금속 스프링 공장을 설립했다. 1967년엔 피스카스의 대표 제품이자 세계 최초로 개발된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오렌지색 가위를 탄생시켰다.
21세기에 들어 소비자 제품 및 기업 인수를 통해 성장에 주력했다. 2007년 생활용품분야에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이탈라, 정원용품사업 강화를 위해 프랑스 르보르뉴를 인수했다. 2013년 명품 핸드페인팅 도자기 브랜드인 로얄코펜하겐을 사들였고 올해는 영국 도자기의 자존심 로열달튼과 웨지우드를 인수했다.
오동은 피스카스한국법인 사장은 “피스카스는 연매출이 2013년을 기준으로 약 1조4000억원에 달했고 올해 인수한 브랜드를 합치면 연매출은 약 1조5000억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오 사장은 “피스카스그룹은 각각의 브랜드가 지닌 전통을 지키면서 발전하는 것을 전략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용성 갖춘 혁신’이 핵심 DNA
핀란드 디자인의 원동력은 ‘실용성을 갖춘 혁신’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디자인이 아니라 인체 특성을 고려한 기능성을 중요시한다. 1967년 세계 최초로 내놓은 쇠손잡이 가위의 불편함을 개선한 오렌지색 플라스틱 가위가 대표적인 예다. 오 사장은 “발상 전환을 통해 디자인을 개선한 제품을 선보이 庸?회사가 새로운 성장가도를 달리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신체가 발달하는 중인 초등학생의 수업시간에 이 가위를 쓰도록 권장할 정도다. 인체역학적 설계를 장점으로 하는 피스카스 도끼도 기존 제품의 불편함을 개선했다. 마리메코는 대담한 패턴으로, 알바 알토의 물결 모양 사보이 꽃병은 뛰어난 예술성으로 유명하다. 이들 역시 혁신의 상징이다.
마티 헤이모넨 駐韓핀란드대사
“간판부터 건축까지…핀란드 디자인은 특별”
핀란드 디자인을 취재하기 위해 주한 핀란드대사관에 연락하자 마티 헤이모넨 대사(사진)는 서울 광화문 대사관보다 성북동 자택으로 와줄 것을 희망했다. 디자인 컬렉션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지난 22일 헤이모넨 대사를 만났다. 독일 스위스 중국 일본 등지에서 외교관 생활을 한 뒤 한국에 부임한 그는 한마디로 “핀란드는 디자인 국가”라고 말했다.
집안은 핀란드 디자인 제품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거실의 ‘흔들리는 나무의자’를 가리키며 “가냘픈 세 가닥의 선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150㎏을 지탱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거실 탁자와 의자는 80년가량의 역사를 지닌 알바 알토의 작품이고, 다이닝룸에 달린 조명갓은 갖가지 형태의 얇은 원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무를 구부려 의자나 탁자를 제작하는 디자인이 바로 핀란드에서 탄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핀란드의 디자인스쿨 역사 ?약 140년에 이르고 디자이너협회의 역사도 100년이 넘는다”며 “많은 생활용품이 핀란드 디자이너에 의해 설계돼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건축물 도시계획 대중교통 간판에 이르기까지 미적인 요소는 핀란드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핀란드식 디자인은 1875년부터 국제적으로 인정받았고 2012년 헬싱키가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것도 이런 노력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다.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n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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