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캐피털, 10년 암흑기 뚫고 힘찬 날갯짓

입력 2015-10-29 07:10
[ 오동혁 기자 ]
2000년대 초 ‘벤처거품 붕괴’ 이후 오랜 침체기에 빠져있던 국내 벤처투자 시장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경제를 앞세워 대규모 정책자금을 풀고 있는 데다 창업 열기도 달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벤처펀드 규모는 올 연말 14조원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2005년 4조7000억원대였던 시장 규모가 10년 만에 세 배 가까이 성장한 셈이다.

짧은 활황 뒤에 긴 암흑기

국내에 ‘벤처캐피털’이 처음 등장한 것은 40여년 전이다. 정부가 직접 자금을 출자해 1974년부터 1976년까지 한국기술진흥(현 아주IB투자), 한국기술개발(현 KTB네트워크), 한국개발투자(현 큐캐피탈), 한국기술금융(현 산은캐피탈) 등 4개의 벤처캐피털을 설립했다. 하지만 당시 기술력을 기반으로 한 ‘벤처기업’은 거의 전무해 투자 실적은 미미했다.

벤처투자 시장이 점차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다. 1986년 ‘중소기업 창업지원법’과 ‘신기술사업 금융지원에 관한 법률’ 등 벤처캐피털 설립 근거법들이 제정되면서 기본적인 법체계가 갖춰졌다.

벤처투자 시장은 외환위기를 극복한 직후인 1990년대 후반 갑자기 불붙기 시작했다. ‘묻지마 투자’ 열풍이 불면서 벤처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 시기에 네이버 넥슨 엔씨소프트 인터파크 등과 같은 인터넷 기반의 기업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정부지로 부풀어오르던 ’벤처 거품’은 2000년대 들어 급속히 꺼지기 시작했다. 김형수 벤처캐피탈협회 전무는 “벤처투자 시장이 코스닥의 벤처 광풍을 제어하지 못하면서 큰 홍역을 치렀다”고 돌아봤다. 이후 벤처투자 시장은 10년에 가까운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2000년 2조211억원에 육박했던 신규 벤처투자 규모는 1년 만에 8913억원으로 반토막 나더니, 2004년에는 6044억원으로 줄어 들었다.

창조경제 바람타고 10년 만의 기지개

침체된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 2008년 출범한 정책금융공사(산업은행에 합병)가 정책자금을 풀어 모태펀드와 더불어 벤처육성에 나서기 시작하면서다. 침체기에 빠졌던 시장도 조금씩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5조원대’의 벽에 갇혀 있던 벤처펀드 규모는 2009년 6조4763억원, 2010년 7조4894억원 등으로 점차 성장하기 시작했다.

벤처투자 시장이 완연한 활황을 맞이한 것은 박근혜 정부에서다. 박 대통령의 국정목표인 창조경제는 벤처기업 발굴과 육성을 타깃으로 정했다. 2013년부터 모태펀드, 성장사다리펀드, 산업은행 등을 통해 수조원의 정책자금을 풀어 ‘벤처투자 생태계’ 조성에 나섰다. 그 결과 벤처펀드 규모는 2013년 10조원을 넘어섰고, 2014년에는 12조원을 돌파했다.

올 들어선 대기업, 금융회사, 연기금 등이 가세하면서 시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지난 8월 13조1637억원에 달했던 벤처투자 규모는 연말까지 14조원 문턱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신규 투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1조6393억원이 투자됐고, 올해는 투자금이 1조8000억~2조원대에 달할 전망이다. 투자를 받은 벤처기업 수도 2000년 중후반 500~600여개에서 2014년 901개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박용순 중소기업청 벤처투자 과장은 “올해 신규투자를 받는 벤처기업 수는 1000개를 넘어설 것”이라며 “앞으로 민간자본을 본격적으로 끌어들여 2025년까지 벤처펀드 규모를 20조원으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IPO M&A 활성화해야 선순환”

최근 벤처투자 시장이 단기간에 급팽창하면서 일각에선 “다시 거품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벤처캐피털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벤처투자 기반’이 탄탄해진 만큼 예전과 같은 급격한 거품붕괴 현상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벤처투자업계는 전문성을 중심으로 인적 기반을 강화하고 있다. 벤처캐피탈협회는 다양한 산업경력이 있는 인력들을 대상으로 ‘전문 교육프로그램’을 개설해 매년 100~200명의 신규 벤처캐피털리스트들을 양성하고 있다. ‘금융 전문가’로만 국한돼 있던 기존 벤처캐피털리스트의 ‘풀(pool)’도 점차 각 산업 전문가들로 넓어지는 추세다. 김종필 한국투자파트너스 전무(본부장)는 “정보기술(IT) 및 제조업에만 쏠려 있던 벤처캐피털 전문 분야가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ICT), 바이오, 문화콘텐츠, 게임 등 다양한 산업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10여년 이상의 투자경험이 쌓이면서 우량 벤처캐피털로 도약하는 투자사들도 하나둘씩 등장했다. 한국투자파트너스, 스틱인베스트먼트, LB인베스트먼트, 네오플럭스, KTB네트워크 등의 업체들은 남다른 안목과 풍부한 투자경험을 바탕으로 수천억~1조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해 운용하고 있다.

우려되는 대목도 없지 않다. 대표적인 문제가 ‘회수시장의 침체’다. 국내 벤처캐피털 대부분이 코스닥 기업공개(IPO)를 통해 투자금 회수에 나서고 있지만 상장문턱이 너무 높아 IPO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때, 제 가격’에 자금을 회수할 수 없는 경우가 늘어나면 모처럼 달아오른 벤처투자 시장도 다시 식을 수밖에 없다.

이용성 벤처캐피탈협회장은 “정부가 IPO 및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회수시장을 더욱 활성화해야 벤처업계의 생태계를 선순환 구조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오동혁 기자 otto8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