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조미식품 임옥호 회장
초고추장에만 '한우물'…품질로 경쟁자들 물리쳐
작년 110억 매출 올려
대기업서 인수 제의 거절…진조미 브랜드, 가업으로
[ 김용준 기자 ]
전북 순창 출신인 임옥호 진조미식품 회장은 1967년 서울행 열차에 올라탔다. 열여섯 살 때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가 서울행을 택한 이유는 ‘너무 배가 고파서’였다. “한 끼 먹으면 한 끼를 굶는 삶이 지겨웠다”고 했다. 첫 직장은 회기동에 있는 과자 공장이었다. 1년반은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하며 버텼다.
이 공장에서 맺은 음식과의 인연은 그를 식품업체 대표로 만들어줬다. 임 회장이 1986년 세운 진조미식품은 초고추장 시장을 개척하며, 지난해 11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계산이 나오면 실행하라”
사업기회는 일찍 찾아왔다. 과자 공장에서 일한 지 2년쯤 지나 공장이 부도가 난 것. 직원들에게 인기 있던 그를 눈여겨본 돈 많은 업계 사람이 직접 경영해 보라고 권했다.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뒤 원료 공급 등의 문제로 망해버렸다.
임 회장은 “죽어야겠다고 생각 構?살충제를 넣고 다닐 정도로 힘들었다”고 했다. 충격에서 벗어난 뒤 그는 반찬장사 등 40여가지 직업을 경험했다. “젊음이 가장 큰 밑천이었다”고 회고했다.
1984년 찾은 직업은 가락동 농수산물시장 중개인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어느 날, 횟집 앞을 지나가다 큰 대야에 초고추장을 만드는 것을 봤다.
‘저렇게 더럽게 만드는 것을 먹는구나’ 생각했다. 이내 생각은 ‘저걸 대량으로 제조해 팔면 어떨까’로 바뀌었다. 직감이었다. 곧 사업성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량으로 고추를 구매하고, 위생적으로 생산해 마진을 붙이면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 섰다. 실행에 옮겼다. 경기 포천에 있는 작은 공장을 빌려 진조미식품을 설립한 것.
이후 서울 방산시장을 돌며 가장 좋은 맛을 낼 수 있는 재료를 찾아냈다. 그는 “더 좋은 재료를 더 싸게 사기 위해 현금으로 거래했다. 때로는 선금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현금거래는 진조미의 경영방침이 됐다.
○영업사원이 필요없는 회사
제품을 생산해 수산시장을 찾았다. 진조미식품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영업이었다. 지금도 영업사원이 없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팔 게 없어서 이런 걸 파느냐”고 외면했다. 5년간 적자였다. 그는 “언젠가는 될 거라 생각하고 버텼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숨통이 트였다. 1990년 트럭을 가지고 다니며 오징어나 생선회를 파는 상인들이 생겨났다. 이들이 진조미 제품을 쓰기 시작하자 입소문이 났다. 수산시장 횟집 중 하나둘 쓰더니 전체로 퍼졌다. 지금은 노량진, 가락동 수산시장 횟집의 90% 이상이 진조미 제품을 쓰고 있다.
이후 나타난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쳤다. 임 회장은 “그들은 가격경쟁을 했다. 하지만 나는 품질로 승부했다”고 설명했다. 한눈팔지 않고 초고추장에 매달린 것도 성공비결이었다.
몇 년 전 여러 대기업으로부터 회사를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진조미 브랜드로 자식 대대로 사업을 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그는 “품목을 늘리고 수출도 해 20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은퇴하고 싶다”고 말했다.
포천=김용준 기자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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