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용호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게 듣는다
정부가 모든 것 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국회만 가면 정책이 정치화돼…국민 불만엔 '포퓰리즘 처방'
저출산 근본 해법은 지속 성장…한국은 '위기극복 DNA' 있다
만난 사람=차병석 경제부장
[ 정리=황정수 기자 ]
백용호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은 막힘이 없었다. 주장-근거-대안 순으로 논리 정연하게 정리된 답변은 질문당 2분을 넘지 않았다. 이화여대 연구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내내 그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백 전 실장은 “내 인생에서도 내리막이 있었지만 반성의 계기로 삼고 미래를 준비했다”며 “지금 한국 경제도 어렵다고 하지만 조바심 내지 말고 준비하면 재도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절망보다는 긍정의 힘이 필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백 전 실장은 한국경제신문이 창간 51주년 특별기획인 ‘대한민국 미래 리포트’에서 지적한 구조적 문제점들에 대해 조목조목 구체적 해법을 제시했다.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에 함몰됐다는 지적을 받는 국회에 대해선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국민을 향해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나와야 나라가 산다”고 강조했다. 공무원들의 복지부동과 관련해선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정책이 뒤집히는 일이 없어야 관료들이 소신껏 일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저출산 문제에 대한 해법도 분명했다. 그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며 “한국 사회에 만연한 반기업정서를 걷어내고 기업들이 맘껏 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가장 바뀌어야 할 집단으로 정치권이 꼽힙니다. 국회가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을 통합시키지는 못할 망정 갈등을 증폭시키고 국민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도 많지요.
“정치인들이 국민의 상대적 박탈감, 양극화, 실업 등의 문제를 가장 손쉽게 해결하려는 게 포퓰리즘입니다. 하지만 깊은 고민 없이 나온 단기 처방은 장기적으로 국민에게 믿음을 주지 못합니다. 인기에 매달리지 않고 때로는 국민에게 ‘아닌 건 아니다’고 말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이 ‘노’라고 말하는 정치인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국민의 정치의식이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낙후된 정치시스템이 국민의 수준을 못 따라가고 있어요.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 국가 미래비전을 명확히 제시하는 정치인이 있다면 국민은 옳은 판단을 내릴 것입니다.”
▷낙후된 ㅔ】첵뵀邦?어떤 것을 예로 들 수 있을까요.
“국정감사죠. 국정감사에선 정쟁이 아니라 정책에 집중하기를 원하는 게 국민의 정서 아닐까요. 국민의 의식과 요구에 동떨어진 ‘정책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예컨대 성장과 복지,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상생·공존의 개념인데 국회에선 이념을 덧칠해 정쟁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국가의 이익, 국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데 안타깝습니다.”
▷해결책은 없을까요.
“결국 국민이 국회를 견제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수준 이하의 국회의원에 대해선 임기 중에도 국민이 소환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회뿐만 아니라 공무원도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은데요.
“한국 관료집단엔 훌륭한 인재가 많이 모여 있지요.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정부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생각부터 관료들이 버려야 해요. 이제 민간의 힘이 워낙 커지지 않았습니까. 국민들도 일만 터지면 정부에 대책을 내놓으라고 따지는 관행도 바꿔야 합니다. 정부의 역할은 이제 시장의 규칙을 만들고, 시장참가자들이 그 규칙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역할로 충분해요.”
▷공무원은 ‘대통령 5년 단임제’의 리스크를 많이 지적합니다만.
“정권이 바뀌더라도 옳은 정책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겠지요. 공무원은 자신들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정책이 차기 정권의 입맛에 맞을까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권이 바뀌면 되풀이되는 전(前) 정권 정책에 대한 감사원 감사, 해당 공무원에 대한 인사 불이익을 경험해봤기 때문이죠. 공무원들이 소신을 갖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게 중요합니다.”
▷정부 부처의 세종시 이전으로 정책 품질이 떨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대책은 없을까요.
“세종시는 이제 되돌릴 수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렇다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지요. 무엇보다 국회가 세종시에 있는 공무원을 너무 자주 서울로 부르는 관행부터 고쳤으면 합니다. 공무원의 국회 출장만 줄여도 세종시 비효율의 상당부분이 해결될 겁니다.”
▷관치 때문일까요. 한국의 금융 경쟁력이 우간다보다 낮다는 평가를 받는 건 왜일까요.
“그동안 정부가 제조업을 1순위 육성대상으로 삼고 금융은 제조업을 돕는 하부구조로 봤습니다. 금융회사 인사에 정부 입김이 들어가기도 했죠. 제조업은 글로벌 경쟁을 하면서 상당한 자생력을 키웠지만 금융업계는 경쟁의 무풍지대에 안주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겠지요. 금융산업 경쟁력을 높이려면 금융사들의 해외 진출을 촉진해 글로벌 경쟁에 노출시켜야 합니다.”
▷한국의 주력 제조업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대안으로 서비스산업을 육성하자는 목소리도 큽니다.
“제조업이 힘들다고 지금까지 쌓아온 강점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서비스산업과 함께 발전시켜야겠지요. 예컨대 정보기술(IT)과 제조업의 융합, 문화·예술산업과 제조업의 시너지 창출을 적극 추진해야 합니다. IT와 문화산업은 한국이 역량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문화콘텐츠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 국가 이미지가 개선돼 제조업 수출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의료산업도 유망 분야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가는 분야가 어디입니까. 의과대학 아닙니까. 우수 인재가 몰려 있는 의료분야를 이제 ‘산업’으로 보고 국가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업종으로 키워야 합니다.”
▷저출산·고령화도 심각한 문제인데요.
“저출산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경제문제라고 봅니다. 청년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결혼·육아·부양 비용부담이 커지니까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 아닙니까. 저출산의 근본적 해결책은 결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겁니다.”
▷경제 성장이 시급한데 국회에선 반기업정서에 기댄 기업규제법안만 양산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반기업정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민주화’란 이름 아래 기업을 규제하고 있는 게 그런 것이죠. 각국이 ‘경제 전쟁’을 벌이는 시기에 기업 경영을 억제하는 퇴행적인 규제는 없어져야 합니다. 기업이 살아야 국가도 성장합니다. 물론 기업인도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반기업정서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지금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요즘 우리 국민이 너무 자신감을 잃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50여년간 세계 어느 나라도 이루지 못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우리 국민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DNA를 갖고 있어요. 해외 석학들은 한국의 훌륭한 인적 자원을 부러워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도전해야 합니다. 제가 요즘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꿈과 희망’입니다.”
■ 백용호 前 실장은…
교수, 장·차관급 요직 거친 시장주의자
백용호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철저한 시장주의자다. 대학교수로 출발해 국회의원 후보, 이명박 정부의 공정거래위원장·국세청장·청와대 정책실장을 두루 거치면서 그가 일관되게 유지해온 철학은 시장주의였다.
화려한 경력의 그는 “내 인생에서 오르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중학교 졸업 후엔 학비가 없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했다. 대학생 시절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캠퍼스의 낭만과는 담을 쌓았다. 1996년 당시 신한국당 국회의원 후보로 서울 서대문을에 출마했다가 낙선해 5년 남짓 야인생활도 했다. 백 전 실장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려운 순간에도 도전정신을 잃지 않는 것”이라며 “그런 도전정신과 긍정적 마인드로 한국도 구조적 위기를 이겨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1956년 충남 보령 출생 △중앙대 경제학과 졸업 △뉴욕주립대 경제학 석·박사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공정거래위원장 △국세청장 △청와대 정책실장 △대통령실 정책특별보좌관 △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현재)
정리=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