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오해와 진실 <31>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토양
경제적 자유 보장돼야 민주주의 발전
성공한 중산층이 '건전한 민주화' 견인
80년대 친(親)시장 개혁한 칠레
경제 성장으로 군부정권도 무너져
"시장질서가 모든 자유의 보루" 입증
거래할 자유와 기업할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는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다기보다 빈부격차만 늘릴 뿐이라는 반(反)시장적 비판의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린다. 민주(民主)란 다수의 합의로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정치질서를 의미한다. 자유시장에 대한 이런 불신 때문에 ‘경제적 자유’는 억압해도 되지만 참정권을 의미하는 ‘정치적 자유’와 언론·출판·집회의 자유를 의미하는 ‘시민적 자유’는 어떤 이유로든 제한해서는 안 될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게 좌파 사상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를 가볍게 보는 태도는 시장질서에 대한 무지와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다.
자유시장은 시민적 자유와 민주주의가 번창할 수 있는 유일한 토양이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투자와 창업을 결정하고 ≠ㅐ?살림살이를 관리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냉장고 등 상품에 대한 의사를 돈으로 표현한다. 시장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방법을 배우고 학습하는 사람들이 정치에서도 표로 의견을 표현하고 합당한 정당과 정치인을 선택하는 방법을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
경제적 자유화는 의사결정을 수많은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분산시킨다는 뜻이다. 그런 분산의 결과, 다양한 생각과 삶의 목적 등 다원적 사회가 형성되는데 이는 권위주의 대신 다원적 대의제 민주정치의 전망을 높여준다.
흥미로운 건 경제적 자유는 경제적 번영을 거쳐 민주 발전을 일군다는 점이다. 경제적 자유 없이는 어떤 사회도 번영을 기대할 수 없다. 인류가 척박한 원시시대를 극복하고 문명화된 길을 연 건 사유재산제와 시장의 발달 덕이었다. 한국이 1960년대 1인당 소득 70달러 선의 빈곤을 극복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로 성장한 것은 유정호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가 밝혔듯이 관치경제나 정부 주도 발전모델이 아니라 경제적 자유, 사유재산권, 수출 지향적 개방정책 덕분이었다.
주목할 것은 그런 경제적 번영의 과정에서 성공한 기업가·노동자·자본가계층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두터운 중산층을 구성한다. 경제적으로 독립적이고 정치적 의식 수준이 높은 것이 이 계층의 특징이다. 한국의 역사가 뚜렷이 보여주듯 경제적 자유는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이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중산층 세력을 키웠다. 권위주의에 대항해 정치적 자유를 관철했던 것도 이 계층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민주화는 좌파 운동권의 독점적 산물로 여기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이는 착각이다. 운동권의 민주화는 중산층이 이끈 ‘건전한 민주화’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다. 그게 ‘87년 체제’다. 1997년 외환위기와 오늘날 저성장의 시대를 불러온 게 87년 체제가 아니던가.
경제적 자유화로 경제성장과 함께한 중산층의 부상은 현재의 중국도 보여준다. 친(親)시장개혁으로 중국에는 수천만명의 기업가가 배출됐고 두터운 중산층이 등장했다. 독립적인 중산층은 공산당의 권위주의에 맞서 정치적 자유와 대표자 선출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가격규제를 없애고 거래를 개방하는 등 친시장개혁으로 경제적 번영과 함께 부상한 중산층이 주도해 권위주의 정부를 무너뜨린 대표적인 사건은 1980년대 피노체트 정권의 칠레에서도 볼 수 있다.
좌파는 경제적 자유는 억압해도 되지만 언론·집회·사상의 자유는 신성불가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틀렸다. 경제적 자유가 상실되면 시민적 자유도 사라지고 그에 따라 민주주의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예를 들어 외환 통제는 경제적 자유의 억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반정부 인사의 해외출국을 봉쇄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출판·인쇄의 국가독점도 경제적 자유만이 아니라 언론·표현의 자유를 위태롭게 한다. 정부가 은행, 통신 등을 소유하거나 통제한다면 이는 경제활동만이 아니라 정치적 표현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경제에 많이 간섭할수록 기업들은 정부정책을 비판하기가 어려워진다. 비판하는 기업이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강도 높은 세무사찰이나 암암리에 행사하는 교묘한 정치적 압박일 뿐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거성 하이에크가 표현했듯이, ‘부(富)의 생산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생활 자체를 통제하는 길’이다. 자유자본주의 경제는 시민적 자유는 물론이요 정치적 자유의 보루(堡壘)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캐나다 프레이저연구소의 ‘세계경제자유보고서’가 통계적으로 입증하듯 경제적 자유가 많은 나라일수록 시민적 자유도 높고 정치적 권리도 잘 보호돼 민주주의가 융성·발전한다. 시장경제질서가 모든 자유의 보루라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입증된다. 경제적 자유가 없었던 옛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에서는 시민적 자유도 없었고 민주주의도 죽었다. 봉건사회의 폭정을 극복한 것도 시장의 자유였다. 신분에 따른 토지 소유, 법 적용의 차별 등 제도화된 불평등을 극복해 법치 실현을 가능하게 한 것도 시장의 자생적 질서였다.
세계 역사를 보면 시장의 자유란 기반에서 시민적 자유가 풍성하게 발전했고, 정치적 자유와 함께 민주주의가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시장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시민적 정치적 자유의 꽃이 피었다. 한국 사회도 시장의 자유와 번영이 보편화되면서 시민적 자유가 번창했고 점진적으로 참정권도 다채롭게 누릴 수 있게 됐다. 미국의 싱크탱크 프리덤하우스가 보여주듯 오늘날 한국 사회는 미국이나 영국, 독일 등 세계 어떤 사회 못지않게 시민적 자유와 정치적 권리가 잘 보장돼 있다. 인도와 같이 경제적 자유가 없어 빈곤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정치적 자유와 건전한 민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오늘날 러시아의 민주개혁이 실패한 이유도 자유시장의 활성화가 아닌 계획경제의 두터운 잔재 때문이다.
한국 사회도 시장경제의 바탕이 없었다면 민주주의는 왜곡되고 부패로 얼룩졌을 것이다. 번영하는 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만이 안정적이고 건전하게 작동할 수 있다. ‘개인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모든 민주주의는 자유자본주의 경제를 기반으로 한다’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마이클 노박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 말썽부리는 민주주의
입법 과정서 로비·입김…각종 규제로 경제활동 위축
자유시장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자양분을 제공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둘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던 게 사실이다. 민주주의는 자신을 키워준 자본주의에 늘 말썽을 부렸기 때문이다.
민주국가 국회의 소관사항인 입법(立法) 과정을 보자. 국회의원들은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적 경쟁을 통해 선출된다. 선출된 의원들은 다수의 합의를 통해 법을 생산한다. 흥미로운 건 복잡한 법 생산 과정을 거쳐 나오는 결과물이다. 가격·운임·요금규제, 특정 산업·기업군을 우대하거나 차별하는 특혜·차별입법 등이다. 선심성 복지를 위한 입법도 간과할 수 없다.
이익단체들의 요구와 정부부처의 로비를 받아 그들의 입맛에 맞는 법을 만드는 ‘청부입법’도 민주입법의 부산물이다.
‘규제공화국’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첩첩이 쌓인 규제, 방만한 재정운용, 통화확대 등을 불러와 민주적 입법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억압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왜곡한다. 고실업, 저성장, 경제위기 등 우리를 끊 曇坪?괴롭히는 병폐를 야기하는 게 민주주의다. 오늘날 한국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 이유도 경제적 자유를 억압하는 의회의 입법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자신을 키워주는 토양을 훼손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의회에 입법권을 부여했지만 입법권의 남용을 효과적으로 차단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치명적 실수 때문이다.
실수의 근원은 민주주의 이념 자체에 있다. 민주주의 이념은 ‘법의 내용’을 무시하고 누가 법을 만드는가의 문제만을 중시한다. 법을 제정하는 것은 국민이 뽑은 의회다. 그래서 의회에서 다수의 지지만 받으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법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법 인식은 법치에 어긋나는 의회주의의 치명적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다수가 원한다고 해서 생산한 반(反)시장적 규제를 법이라고 볼 수는 없다.
법 같지도 않은 법의 생산을 막아야만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그런 법 생산을 억제하는 장치는 ‘자유의 헌법’이다. 이를 통해서 비로소 민주주의는 시민적 자유와 더불어 자유시장과 평화롭게 동거할 수 있다.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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