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무원 채용하겠다며 42억 챙겨
"나 김기춘 전 비서실장 6촌인데"…유력인사 앞세워 수억 뜯어내기도
"권력에 약한 한국 사회의 그늘"
[ 오형주 기자 ]
“저는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1280조원을 관리하는 청와대 국고국 직원입니다. 비자금 관리 과정에 급히 필요한 1억원을 빌려주시면 나중에 2억원으로 돌려주고 별도로 공로금 30억원을 지급하겠습니다.”
지난 3월 정모씨(59)는 김모씨(59)로부터 이 같은 제안을 받았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외모가 비슷한 김씨는 김 전 실장의 6촌 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김씨 등 세 명은 이 같은 수법으로 2억원을 가로챈 혐의(사기)로 지난 20일 서울 혜화경찰서에 구속됐다.
경찰 관계자는 “김씨의 얼굴이 김 전 실장과 많이 닮아 깜짝 놀랐다”며 “통치자금의 존재 사실을 누설하면 민형사상 책임을 진다는 보안각서도 쓰게 해 피해자들이 쉽게 속아 넘어갔다”고 말했다.
청와대 등 국가기관 직원을 사칭하거나 고위 정치인·유력인사와 ?안다며 피해자를 속여 돈을 뜯어내는 권력층 사칭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대검찰청 통계에 따르면 사칭 사기범죄는 2011년 9555건에서 2013년 2만4379건으로 급증했다.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신뢰가 낮고 권위에 쉽게 순응하는 한국 사회의 이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과거 정권 비자금 있다며 유혹
권력층 사칭 사기범이 피해자를 현혹하기 위해 가장 자주 동원하는 수법은 “과거 정권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비자금을 숨겨놨다”는 말을 믿게 하는 것이다. 16일 서울 관악경찰서가 사기 혐의로 구속한 문모씨(62) 일당도 이런 수법을 동원했다.
문씨는 6월 한 영화제작업체의 투자설명회에 참석해 투자자에게 지급 기일이 지난 100억원어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보여주며 “청와대 경호실에서 일하던 A씨를 통해 한국은행 지하에 있는 비자금 50여억원을 빼낼 수 있다”며 투자를 제안했다.
박승수 관악서 지능팀장은 “이들은 위조된 금괴나 달러화 등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동영상 등을 보여주면서 피해자를 현혹하려 했다”며 “경찰서에 붙잡혀 와서도 지하자금이 있다고 한동안 설득시키려 해 무척 황당했다”고 말했다.
문서를 조작하거나 가짜 감사패 등을 제작해 장기간 돈을 뜯어내기도 한다. 6월 울산 울주경찰서가 구속한 이모씨(53)는 골프장에서 만난 물류업자 두 명에게 자신을 “청와대 핵전담 특별 보좌관 ‘코드3’라 불린다”고 소개한 뒤 4년간 각종 명목으로 2억1000만원가량을 받아 챙겼다.
그는 ‘원자력 감독관’ 문구가 적힌 옷을 입고 울산 일대 골프장을 돌아다니며 대통령 명의의 감사패 등을 제작해 건네는가 하면 대통령이나 청와대 비서실과 통화하는 것처럼 행동해 피해자를 감쪽같이 속였다.
극심한 청년 취업난을 틈타 정부기관 산하 비밀조직에 취업시켜준다며 유혹한 사례도 있었다. 서울 성동경찰서는 대통령 지시로 구성된 국방부 비밀조직에 군무원으로 채용하겠다며 취업준비생 등 280명으로부터 42억원가량을 챙긴 민모씨(78) 등 네 명을 5월 구속했다.
대기업 CEO 상대 취업사기까지
아예 주요 대기업 최고경영자(CEO)를 상대로 직접 전화를 걸어 청와대 관계자를 사칭한 대담한 취업사기 행각이 벌어지기도 했다.
3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부장판사 임동규)는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사칭해 취업사기를 벌인 조모씨(53)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했다. 조씨는 2013년 7월 박영식 대우건설 사장에게 이 비서관을 사칭한 전화를 걸어 취업을 부탁했고, 대우건설은 조씨를 부장으로 채용했다. 1년 후 조씨는 같은 수법으로 황창규 KT 회장에게 전화해 다시 취업을 시도했으나 신원확인 과정에서 범행이 들통나 경찰에 붙잡혔다.
전문가들은 사칭범이 기승을 부리는 배경에는 권력층 인사와 좀 더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는 대중의 허영심이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대중은 내세울 만한 유력인사와의 친분을 과시하는 사람을 쉽게 신뢰하고 그에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오랜 권위주의 정치 그늘이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거나 번복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는 인식이 아직도 팽배하다”며 “사기범죄 처벌을 좀 더 세분화해 권력층 사칭 범죄에 대해 처벌 수위를 높이는 등의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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