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찰스 헤이 대사 "부임전 3주간 부산서 하숙생활…한국 언어·문화 익히려 노력했죠"

입력 2015-09-24 19:04
수정 2015-09-25 11:12
찰스 헤이 주한 영국대사
"에볼라 의료진 파견 매우 인상적…원조받던 한국, 글로벌 강국 성장"


[ 박종서/나수지 기자 ] 외교관은 천직
외교관 아버지따라 10여개國 살아
아시아 외교의 중심 주한대사 선택

한국이 어디 있는지 몰랐던 두 딸
'싸이의 나라' 간다고 하니 좋아해

영국도 한류 영향권
K팝 영향…영국대학, 한국어과 인기
한식·문화 세계서 경쟁력 충분해

내달 2~3일 영국 근위대 내한 공연
양국 문화 나누는 기회 됐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가 이어졌다. 저녁 6시 반에 시작한 인터뷰는 밤 11시가 다 돼서야 끝이 났다. 소탈한 인상의 찰스 헤이 주한 영국대사(50)는 시종일관 재치 있는 농담과 호쾌한 웃음으로 대화를 이끌었다. 작년 8월 한국으로 와서 지난 2월 공식 부임한 헤이 대사를 서울 무교동 일식집 ‘가나’에서 만났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특별히 일식집으로 초대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껄끄러운 한·일 관계를 생각하면 다소 까칠한 질문이었다. 그는 유머로 대답했다. “일식집이 아니라 횟집”이라며 크게 웃었다. 이어 한국말로 “회를 좋아합니다. 튀김도 좋아해요”라고 말했다. 한국 부임이 결정된 뒤 1년간 배웠다는 한국어가 유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헤이 대사는 대화 중간중간에 우리말을 ‘양념처럼’ 섞어 쓰며 상당한 한국어 실력을 과시했다.

아홉 살·여섯 살 두 딸, 싸이의 ‘광팬’

도미 광어 참다랑어 연어 등 각종 회가 정갈하게 담긴 접시가 식탁에 올랐다. 헤이 대사는 능숙한 젓가락질로 광어회를 한 점 먹더니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맛이 일품이라고 치켜세웠다. 숙성회라 일반 활어회와는 씹히는 맛이 달랐다.

주한 대사로 오겠다고 결정한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은 아시아의 시대입니다. 한국은 북한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와 인접해 있어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당연히 욕심이 났죠. 아이들과 함께 와야 했으니 안전한 나라여야 했고요. 한국행을 결정했더니 주변에서 모두 잘했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헤이 대사에겐 아홉 살과 여섯 살 두 딸이 있다. 그들은 처음엔 한국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하지만 기꺼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가수 싸이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했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런던 시내 어느 파티에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아이들도 싸이의 ‘광팬’이었죠. 싸이의 비디오를 매일 봤고 ‘말춤’도 곧잘 따라했어요.”

유일한 걸림돌은 언어였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 말고도 프랑스어 스페인어 체코어 등 4개 국어를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외교관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한국을 부임지로 택한 만큼 한국어를 배워야 했다. 헤이 대사는 한국말을 익히기 위해 공식부임을 앞두고 부산의 한 한국인 가정집에서 3주간 하숙을 했다. 부산을 택한 이유는 임기(3년) 동안 줄곧 서울에서 머무를 테니 ‘제2 도시’에서 살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은 뭐가 다르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한국말로 “거기는 사투리를 써요”라고 답했다. 세련되고 부드러운 느낌의 서울과 달리 항구도시 특유의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고 했다.

한식 경쟁력 있는데 아직 홍보가 부족

헤이 대사가 평가하는 한국의 위상은 어느 정도일까. 그는 한국이 세계 주요 이슈를 함께 고민하고 책임지는 ‘글로벌 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아프리카에서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한국의 대응을 좋은 사례로 들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은 어쩌면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번엔 의료진을 파견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에볼라 사태 외에도 한국은 세계 평화 유지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지역 내 관심사에서 벗어나 세계를 보고 있어요. 매우 인상적인 변화입니다.”

내친김에 한국의 장점과 단점을 알려달라고 했다. “강점은 확실합니다. 아시다시피 매우 열심히 일하고 일 처리가 빨라요. 단점이 있다면 그것 또한 너무 열심히 일한다는 거예요. 어느 정도 부유해졌으니까 한국인들이 조금은 여유를 느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식 등 한국과 관련된 브랜드를 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마케팅 역량도 좀 더 키워야 할 부분이라고 조언했다. 음식만 놓고 보면 한식이 일식보다 더 인기를 끌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헤이 대사는 한국에 온 뒤 거의 매일 한 끼 이상은 한식으로 해결한다며 삼겹살, 갈비, 오징어볶음, 제육볶음, 보쌈 등 한국 음식 이름을 줄줄 댔다. 그중에서도 닭과 소스, 잡채의 조합이 환상적이라며 안동찜닭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학생이 늘어나면서 영국 대학들이 연이어 한국어 과목을 개설하고 있어요. 학생들이 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지 알아봤더니 K팝(한국 대중가요) 때문이더라고요. 제가 주한 대사로 오니까 친구 중 한 명이 조카에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며 K팝 상품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어요. 한국은 한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류로 채워지지 않는 곳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마케팅이 필요합니다.”

외교관 아버지 덕분에 10개국에서 거주

접시에 올려진 회가 절반쯤 없어지자 식사 초반 빠르게 움직였던 젓가락의 속도가 조금 줄었다. 대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어 볼 여유가 생겨났다. 마침 이 ‘횟집’이 자랑하는 어란(魚卵)이 식탁에 올랐다. 어란은 숭어알을 특급 간장에 하룻밤 재운 뒤 한 달간 그늘에 말린 음식이다. 소쿠리에 널어둔 어란이 고들고들하게 마르면 참기름을 발라서 방망이로 펴낸다. 짭조름하면서도 차진 식감이 인상적이었다.

외교관이 되겠다고 결심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회고했다. 헤이 대사는 아버지 덕분에 어릴 적 태국과 호주 등 세계 각국에서 살아볼 기회가 있었다. 1년 이상 거주한 나라만 10여개국에 이른다. “아버지는 외교관의 삶이 얼마나 의미 있고 또 재미있는지 알게 해줬어요.”

공익을 위해 사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 믿었던 것도 공직을 선택한 이유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육군에 지원해 6년간 복무했고, 포클랜드에서 대위로 예편했다. 군인을 포함해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다. 헤이 대사는 포클랜드에서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과 함께 춤을 춰봤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랏밥’을 먹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기회라며 으쓱해 했다. 그는 1999년 영국 외무부의 코소보평화회담 담당 대변인을 맡았을 때 프랑스 정부의 통역사로 일했던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역시 외교관이었기에 가능했던 인연이었다.

취임 첫날 영국에서 국방장관 방한

맥주가 서너 순배 돌자 일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일복이 많다고 했다. “대사로 공식 취임한 올해 2월1일, 국방장관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어요. 비무장지대(DMZ)에 함께 갔는데 저도 처음이어서 안내라기보다는 동반여행에 가까웠죠. ‘신고식’을 호되게 했지만 대사 업무를 하는 데 매우 유익했습니다. 얼마 뒤에는 외무장관이 방한했고 지난 4월에는 6·25전쟁 참전용사단 85명도 왔었어요.”

헤이 대사는 6·25전?참전용사에 대한 인상이 각별했다고 언급했다. 백발이 성성해진 참전용사들이 부산 유엔묘지를 찾아 한국인의 환대를 받고 “내가 왜 싸웠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했을 때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6·25전쟁 때 영국은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병력(5만6000명)을 파견했다. 이등병으로 6·25전쟁에 참여했던 88세의 윌리엄 스피크먼 씨가 영국 최고의 무공훈장(빅토리아십자훈장)을 한국에 기증하고 임진강 인근 317고지에 묻히고 싶어 했다는 말을 전할 땐 그때의 뭉클함이 되살아난 듯 잠시 말이 끊기기도 했다.

헤이 대사는 요즘 영국 정부의 핵심 해외 홍보활동 가운데 하나인 ‘그레이트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국은 영국 정부가 11개국을 지정해 진행하는 ‘그레이트 캠페인’의 우선 개최 국가다. 캠페인은 다음달 2~3일 서울 신촌 문화의거리(연세로)에서 열리는데, 영국 왕실 근위병 군악대도 내한 공연을 한다. 헤이 대사는 “빨간색 상의(튜닉)를 입고 검은색 곰가죽 모자를 쓴 영국 왕실 근위병 군악대의 공연을 포함해 행사 기간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 자산을 소개할 예정”이라며 “한국인들이 영국 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찰스 헤이 대사의 단골집 가나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숙성회…짭짤한 어란도 별미

가나는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숙성회 전문 일식집이다. 1964년 17세 때 전남 진도에서 상경해 50년간 일식업에 종사해온 윤권중 사장(67)이 직접 조리한다.

윤 사장은 1983년 독립해 가나를 차렸다. 그의 명함에는 사장 대신 반장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다. 처음 일식집에서 일할 때 ‘윤 반장’으로 불리던 시절의 초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곳에선 도미 광어 민어 농어 등을 회 뜬 뒤 약 5도에서 3시간 이상 숙성해 내놓는다. 김남조 조영서 이유경 등 시인들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하다. 모둠회는 1인당 7만원, 저녁 정식과 점심 정식은 각각 4만원, 3만원이다. 영업시간은 월~토요일 낮 12시~오후 10시. 일요일 등 공휴일은 쉰다. (02)755-7495

■ 셰브닝 장학금 제도 운영…英대학교 등록비용 지원

찰스 헤이 대사는 영국 정부가 한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외무장관의 관저 이름을 본떠 정한 ‘셰브닝 장학금’은 전도유망한 세계 각국의 젊은이를 지원하는 제도다. 영국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는 데 필요한 비용을 보조해준다. 한국에서도 올해 20명을 뽑는다. 영어 능력과 2년간의 직장 경력이 필요하다. 11월3일 오후 9시까지 신청을 받는다.

■ 찰스 헤이 대사

△1965년 영국 스코틀랜드 출생 △1987년 영국 사우샘프턴대 철학·정치학과 졸업 △1993년 영국 육군 보병부대 고든하이랜더스 대위 예편 △1993년 영국 외무부 안보정책담당 사무관 △1998년 영국 외무부 공보관. 코소보평화회담 외무부 대변인 △2004년 영국 외무부 G8 회의 준비기획단장 △2006년 주(駐)스페인 영국부대사 △2011년 영국 외무부 영사국장 △2015년 주(駐)한국 영국대사

박종서/나수지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