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툭하면 제비뽑기…운이 좌우하는 '추첨공화국'

입력 2015-09-18 20:11
학교도 군대도 직장도 추첨
경쟁 결과에 승복 안하는 풍조
잡음 기피하는 정부 '합작품'

노력으로 생긴 공정한 차이보다
결과에 대한 불만 무마가 우선
보편적 복지 원하는 것과 비슷


[ 김주완 기자 ]
실력과 노력으로 갈라야 할 성패(成敗)를 운(運)에 맡기는 추첨제가 한국 사회 전반으로 퍼지고 있다. 국공립 유치원과 국제중, 자율형 사립고 입학은 물론 대학생 아르바이트와 공무원 선발에까지 추첨제를 도입하고 있다. 경쟁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사회의식에다 특혜 시비 등 잡음을 피하려는 정부의 무책임이 어우러진 결과다. 노력보다는 복불복(福不福)으로 정해지는 것들이 늘면서 한국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 사회에 추첨제가 늘고 있는 근본 원인은 치열한 경쟁의 결과를 패자나 탈락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들이 우열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특혜 시비 등을 제기하면 정부가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방법이 ‘제비뽑기’다. 운으로 결정되는 만큼 패자의 불만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이유에서다. 패자나 탈락자에게 경쟁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결과를 설득歐羞릿募?가장 잡음없는 추첨제를 도입하는 정부의 무책임도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불만 생기면 추첨제 도입

서울시는 지난 2월 공원을 관리하는 근로자 300명을 추첨으로 선발했다. 기간제 근로자이긴 하지만 정규직 전환율이 높아 인기가 많은 자리다.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추첨으로 뽑는 경우는 있어도 직원을 제비뽑기로 선발하는 건 처음있는 일이다. 서류심사, 실기·체력 검사를 거친 최종 후보자들은 서울시 공원녹지사업소 사무실에 모여 제비를 뽑았다. 합격이라고 쓰인 종이를 뽑은 후보자 30% 정도만 최종 합격했다. 이전에는 심사위원들이 최종 면접에서 해당 업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뽑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채용 시기를 앞두고 서울시 의원들의 청탁이 끊이지 않고 인맥으로 채용한다는 근거 없는 불만이 나와 제비뽑기를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가 올해부터 자율형사립고의 입학 전형을 성적순이 아닌 추첨제 방식으로 유도하고 있는 것도 일부 탈락 학생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란 분석이다. 이에 따라 서울 자사고 중 경문·숭문·장훈고는 내년부터 신입생 전원을 추첨으로만 선발하기로 했다.

정부가 카투사(주한미군 부대에 배속된 한국인 병력) 선발 방식을 추첨으로 바꾼 것도 마찬가지다. 1998년 이전에는 영어 점수가 높은 지원자 순으로 선발했지만 탈락자들의 불만과 민원이 쏟아지자 일정 영어점수 이상자 중에서 추첨으로 뽑고 있다. 민경국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경쟁이 치열할수록 패자들의 불만이 크고, 이 불만을 이기지 못하는 정부가 무책임하게 선택하는 게 제비뽑기”라고 말했다.

경쟁 꺼리는 사회의식 강해

전문가들은 ‘기회의 평등’을 경시하고 경쟁을 꺼리는 사회의식도 추첨제를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경쟁에 따른 우열의 결과를 인정해야 하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쟁 과정에 특혜가 작용한다는 불신도 한몫하고 있다.

국·공립 유치원 입학 전형이 대표적이다. 국·공립 유치원은 애초 선착순 방식으로 원아를 뽑았다. 부지런하게 준비한 부모에게 기회를 더 준 것이다. 하지만 선발 과정에서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결국 2012년 추첨제를 전면 도입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추첨제 선호는 보편적 복지를 원하는 심리와 비슷하다”며 “개인의 노력으로 생긴 공정한 차이보다는 복불복이어도 결과만 평등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추첨제가 아닌 건전한 경쟁시스템을 유지하려면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 강화 등 보완책이 강구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국제중학교나 자율형사립고 등에서 신입생을 뽑을 때 저소득층에 일부 정원을 할당하고 별도로 전형하는 것과 같은 방식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빈부 격차로 기회의 평등이 지켜지고 있지 않다는 불신 때문에 사람들이 추첨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며 “취약계층을 좀 더 배려하는 방법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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