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대통령 질타에도 꿈쩍않는 생명윤리법

입력 2015-09-07 18:17
김형호 중소기업부 차장 chsan@hankyung.com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인간 유전자를 분석하는 데는 20억달러(약 2조원)라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지금은 1000달러면 1주일 안에 인간의 3만4000개 유전자 분석이 가능하다. 차세대유전자분석기술(NGS) 등 첨단기술의 등장 덕분이다.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마티아스 울렌 스웨덴 국립생명공학연구소장이 “과거엔 상상할 수 없던 기술의 등장이 바이오산업 지도를 급격히 바꿔놓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NGS는 바이오 분야의 기술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미국 유럽뿐 아니라 그동안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던 일본마저 규제 완화로 급선회한 것은 바이오산업 주도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조바심에서다.

‘총대’ 메지 않는 정부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생명윤리법)’에 발목이 잡혀 관련 연구가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지난달 17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유전자 치료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어 치료제 개발 및 산업화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며 개선을 주문했지만 현장에선 요지부동이다. 보건복지부의 여러 태스크포스(TF)팀에 참여했던 바이오 기업의 한 사장은 “시민단체는 물론 종교단체들까지 반대하는데 공무원들이 ‘총대’를 메겠느냐”고 했다.

그럴 법도 하다. 생명윤리법은 지난해 8월 박 대통령이 참석한 ‘6차 무역투자활성화 대책회의’에서 이미 개선 계획이 나왔지만 그동안 아무런 진척이 없다. 대통령의 ‘질타’에 복지부는 “개정 노력을 하고 있다”는 군색한 해명만 내놓았을 뿐 이해집단을 중재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생명윤리법 개정을 느긋하게 팔짱 낀 채 바라볼 시간이 없다. 바이오산업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는데다 차세대 먹거리 산업의 성장잠재력마저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2월 시행된 생명윤리법은 유전자 치료범위를 암 등 생명을 위협하거나 심각한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병(질병요건), 현재 이용 가능한 치료법이 없는 연구(치료요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야 유전자 치료를 허용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규제다.

허공에 외치는 ‘미래 산업 육성’

당장 제약사들의 신약 개발에 비상이 걸렸다. 생명윤리법과 달리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고시는 질병요건과 치료요건 중 한 가지만 충족해도 신약 임상시험을 허용한다. 식약처 고시에 따라 임상시험 허가를 받은 12건 중 6건이 상위법인 생명윤리법의 질병 및 치료요건을 어긴 것으로 나타났다. 연말께 신약 허가 신청을 준비 중인 코오롱생명과학을 비롯 제넥신, 진원생명과학 등의 유전자 치료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식약처 기준에 따라 임상시험을 해온 기업들로서는 황당한 노릇이다.

법으로 유전자 치료 연구범위를 제한하는 주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미국 유럽 등은 연구범위를 제한하지 않되 신약 승인 단계에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방법으로 생명윤리법과의 균형을 찾고 있다. 일본도 올해부터 연구범위 제한을 풀었다. 한국만 스스로 손발을 묶은 채 바이오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키우겠다고 허공에다 소리치는 형국이다. 생명윤리법이 정부의 규제 완화와 미래 산업 육성의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고 있는 이유다.

김형호 중소기업부 차장 chs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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